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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1TV ‘역사저널 그날’은 17일 오후 9시40분 ‘광종, 개혁의 칼을 뽑다’ 편을 방송한다. <사진=KBS> |
[뉴스핌=박지원 기자] KBS 1TV ‘역사저널 그날’은 17일 오후 9시40분 ‘광종, 개혁의 칼을 뽑다’ 편을 방송한다.
이날 ‘역사저널 그날’에서는 노비안검법, 과거제, 관복 제정 등 왕권 강화에 힘쓰며 혁신적인 개혁을 한 광종에 대해 알아본다.
광종은 500년 고려 왕조의 기틀을 다진 왕. 그런데 ‘피의 군주’ ‘참소를 좋아한 광기의 왕’ 등 그에 대한 후대의 평가는 엇갈린다. 왜 이런 꼬리표가 붙은 것일까?
형 정종의 뒤를 이어 고려 4대 왕이 된 광종(光宗). 당시 치열했던 후계싸움으로 왕실은 혼란스러웠고, 그 사이 호족들의 세력은 더욱 강성해졌다. 이에 광종은 호족의 힘을 인정하고 고개를 낮춘 채 때를 기다렸다.
956년 마침내 노비안검법(奴婢按檢法)이라는 개혁의 칼을 뽑아 든다. 양인이었다가 억울하게 노비가 된 사람들을 해방하게 한 제도지만 여기에는 호족들의 경제력과 군사력을 약화하려는 숨은 뜻이 있었다. 노비안검법은 호족세력과의 정면대결이자 고려 500년 기틀을 다지는 개혁의 신호탄이었다.
개혁에 물꼬를 튼 광종은 노비안검법에 이어 과거제를 실시한다. 양인 이상이면 누구나 시험을 통해 관직을 얻을 수 있는 혁신적인 제도. 그런데 과거제 시행을 주도한 이는 고려인이 아닌 귀화인이었다.
중국 후주 출신 ‘쌍기’의 건의로 이루어진 과거제. ‘고려사’ 기록에 따르면 광종은 쌍기를 특히 아껴 한림학사의 관직을 내리고, 집과 여자와 재물을 주는 등 파격적인 우대정책을 펼쳐 신하들의 반발을 사기까지 했다.
광종의 총애를 받으며 고려에 파란을 몰고 온 인물 쌍기(雙冀). 그가 고려에 귀화하게 된 사연은을 ‘이광용이 만난 사람, 쌍기와의 대담’ 에서 낱낱이 파헤쳐본다.
광종은 계속해서 왕권 강화책은 신료와 호족들의 강한 불만을 일으켰다. 960년, 광종은 공신세력을 대표하는 준홍과 왕동이 모반했다는 구실을 시작으로 개혁에 반(反)하는 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가한다.
‘고려사’는 “왕이 참소를 믿고 사람 죽이기를 좋아하였다”고 기록한다. 광종은 혜종과 정종의 아들인 자신의 조카들까지 처형하고, 심지어 자기 아들마저 의심하여 멀리하기에 이른다. 광종은 왜 피의 숙청을 했던 것일까.
KBS 1TV ‘역사저널 그날’ 광종, 개혁의 칼을 뽑다 편은 17일 오후 9시40분에 방송된다.
[뉴스핌 Newspim] 박지원 기자 (pjw@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