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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용대 최후의 분대장 김학철 [사진=SBS스페셜 홈페이지 캡처] |
[뉴스핌=대중문화부] 지난 2001년 사망한 조선의용대 최후의 분대장 김학철에 대한 관심이 높다.
1일 오후11시15분 방송되는 삼일절 특집 SBS스페셜 388회 '나의 할아버지 김학철,조선의용대 최후의 분대장'에서는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했던 당시 11세 손녀 김서정 양이 이제 대학생이 되어 할아버지가 스스로 삶을 마감하면서까지 지키고자 한 것은 무엇인지 할아버지의 발자취를 다시 되짚어 보면서 그 해답을 찾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날 방송에서는 2001년 9월 중국 연변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음식을 거부하고 생의 마지막을 준비하고 있던 김학철씨의 마지막 22일을 공개한다.
1941년 12월 조선 청년들로 구성된 조선의용군은 중국 허베이성 타이항산 자락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취재진이 확인해 보니 열악하고 굶주린 상황에서도 조선의용군은 자신들이 ‘조선의 대표’라는 생각으로 모범적으로 처신했고 일본군과의 전투에서도 후좌장 마을 주민들의 피해를 최소화 하기 위해 일본군을 마을 밖으로 유인하는 작전을 썼다. 이런 조선의용군의 모습에 감동을 받은 후좌장 마을주민 중에는 자식들 이름을 胡愛朝, 胡喜朝(조선을 사랑한다. 조선을 좋아한다)라고 지은 사람도 있었다.
이곳 전투에서 다리에 관통상을 입고 일본군에 체포된 분대장이 김학철이다. 그는 해방 후 북한에서 김일성 독재를 비판하다 중국으로 쫒겨나고 중국에서는 역시 마오쩌뚱의 독재를 문제 삼다 10년 간을 중국 감옥에서 보내기도 했다.
조선의용대는 1938년 약산 김원봉, 석정 윤세주 선생 등에 의해 중국에서 창립되었으며 사회주의 사상을 가진 청년들 위주로 구성되었다. 훈련단계에서 해방을 맞이한 광복군과 달리, 실제로 일본군과의 전투에 가담한 무장 독립 단체지만 남에서는 사회주의 단체라는 이유로 북에서는 김일성 독재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어디서도 제대로 주목 받지 못했다.
김학철은 사회주의자이지만 남한 내에서 진보보다는 보수주의자들로부터 더 존경을 받고 있다. 그는 좌와 우라는 인위적으로 설정된 이념을 기준으로 행동한 게 아니라, 철저하게 불의에 항거하고 사익을 배제하고 민족에 우선한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뉴스핌 Newspim] 대중문화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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