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던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오자 해피가 보이지 않았다. 해가 지도록 기다려도, 골목에 나가 서성거려도 나타나지 않았다. 별별 생각을 다 하며 밤잠을 설치고 다음날 학교에서도 내내 해피 생각을 했다. 집에 돌아와 마루 끝에 쪼그려 앉아 기다리고 있는데 누가 잡아간 것 같다고 어머니가 내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그후로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며칠 동안 청주 시내를 샅샅이 돌아다녔지만 해피는 나타나지 않았다. 영영 나타나지 않았다.
4, 5학년 때 나는 <소년중앙>의 애독자였다. 대청마루나 내 방에 누워 그 월간지를 보곤 했다. 그런데 속 내용 보다는 겉표지에 내 눈은 머물러 있곤 했다. 최유리가 표지모델일 때가 많았는데 그렇게 청순하고 예쁠 수가 없어 사진을 바라보다가 눈을 감고 누워 있곤 했다. 미래의 내 여자는 누구일까. 지금 분명 어딘가에 살고 있을텐데, 지금 분명 우리나라 어떤 곳, 어떤 집, 어떤 학교에선가 자라고 있을텐데, 과연 그애가 누구일까, 하는 설레임과 상상 속에.
대청마루가 넓고 펌프 물이 시원하고 해피와의 추억이 있고 <소년중앙>을 보며 꿈을 키우던 이 집에 석유 드럼통이 들이차기 시작했다. 포도 나무, 사철나무, 장미들로 우거진 화단들을 없애고 그 자리에 석유창고가 지어졌다. 대문 위론 ‘석유’라고 빨간 글씨로 쓰여진 간판이 올랐다.
공무원인 아버지의 쥐꼬리만 한 월급만으로는 가계 살림, 자식들 학비가 버거워 어머니가 장사에 나선 것이다. 좀 더 후엔 얼음창고마저 석유창고 옆에 지어졌다. 내가 중학생 때의 일이다. 그러나 어머니는 장사하실 분이 아니었다. 얼음을 팔 때면 가져가는 동안 녹을 것까지 생각해 더 잘라주었고, 석유는 플라스틱 통이 배가 터지도록 퍼주어 늘 손해만 보았다.
오일쇼크 때는 석유 값이 하루 아침에 배나 올라 지금 생각하면 돈을 벌 기회였는데, 쌀 때 사온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다며 종전 값을 받고 싸게 나누어주었다. 우리 집 석유를 가져가 겨울을 따뜻하게 보낸 시내 곳곳의 다방, 식당들에도 받지 못할 외상만 늘어났다.
석유 장사와 얼음 장사는 우리 집을 빚더미에 올려 앉히며 쇠락해갔다. 급한 김에 쓰곤 하는 사채에 떠밀려 내력 깊은 기와집은 몇 번이고 남의 손으로 넘어갈 뻔 했다. 텔레비전이니 냉장고니 하는 물건들에 차압 딱지가 붙었다가 겨우 떨어진 적도 여러 번이었다. 어머니는 우울증에 걸렸는지 안방에 불도 켜지 않은 채 누워 있곤 했고 아버지도 몇 차례 탈진해 쓰러졌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다투는 소리가 종종 들려왔고 아버지를 향한 어머니의 신음조의 잔소리가 밤새 이어지는 날도 많았다. 나는 점점 말 없이 시무룩하게 변해 갔으며 내면에 어둑한 안개가 피어 있는 것 같았다.
석유, 얼음이 다 망하자 이번엔 엿공장이 차려졌다. 조치원에 공장을 짓고 친척 중에 골라 대리인 사장을 시켰다. 덕분에 송판처럼 넓적한 엿판을 가위로 깨며 엿은 실컷 먹을 수 있었지만 이마저 사기를 당해 결국 빚더미가 더 커졌다.
대리인 사장으로 앉힌 친척 아저씨가 중간에 돈을 빼돌렸느니 동업자였던 누가 말아먹었느니 혈압끼 있는 말들이 그러잖아도 불안한 쇠락을 겪고 있던 수동집의 공기를 흔들곤 했다. 집은 또 한 차례 넘어갈 뻔 했고 사채가 굴러가는 횟수가 잦아졌으며 어머니는 안방의 짙은 그늘 속에 식음도 끊은채 더 오래 누워 있곤 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집안 사정은 조금씩 회복되다가 내 결혼 부조금을 순전히 내 고집으로 그쪽으로 다 밀어버린 후에야 마지막 남은 빚에서 겨우 풀려난 집이기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