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책장 문을 닫고 창으로 다가갔다. 결혼 앨범이 나의 눈 아닌 아내의 눈으로 보아지던 그 밤처럼 맑기만 했던 창이 꺼지기만을 바라는 절망의 빛으로 도금되어 가는 것 같았다. 창이 어두워지자 방 전체가 어둠에 쌓여가기 시작했다. 질식할 것 같았다. 아이들만이 희망인데 그마저 버리고 싶을 정도로 가슴이 문드러져갔을 아내의 가슴 속이 시커멓게 타죽어버린 아기 새 같았다.
“내가 원하는 건 사랑의 구체성이라고 했잖아!”
“현주는 사랑 없으면 죽는 애예요.”
“우리 사이에 새로움이 없다면, 나는 못 살 것 같아.”
피에 물든 목소리만이 어둠 속에서 수런대는 것 같았다. 나는 창에 손을 댔다. 서로 손을 포개기도 하며 같이 물걸레질 하던 풍경 위로 겹겹의 어둠이 쌓이고 슬픈 노래가 흘러갔다. 창에 비스듬히 기대 먼 곳을 바라본다. 한강. 꽤 먼 곳이다. 밤 열두 시에 발길을 돌리면 열두 시 반이 넘어야 겨우 닿을 수 있는 곳이다. 그 어둠 속. 강물 소리와 적막 뿐인 강가. 창의 불빛이 등을 밀고 밀어 서러운 눈물 삼키며 가 닿던 곳.
그곳에서 올라오는 불길함을 견디기가 어려웠다. 나는 창가에서 무거운 걸음을 떼어 책장 앞에 다시 섰다. 책장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내 위주의 책들......상상력. 바슐라르. 이미지. 상징주의. 랭보. 프루스트. 까뮈. 보르헤스. 앙리 미쇼. 시집. 소설. 성경. 외경. 이단연구서. 사후세계. 외계문명. 우주변화의 원리. 소립자. 신과학. 신비주의. 영지주의. 연금술. 단전호흡. 고대문명. 노장사상. 불교서적. 벽암록. 이슬람. 힌두. 라마. 샤머니즘. 음양오행. 주역. 정역. 서양철학사. 마르크스. 니체. 화이트헤드. 푸코. 데리다. 들뢰즈. 르네 톰. 바타이유. 체 게바라. 국제정치론. 세계평화론. 제3세계론. 국제금융론. 증권투자. 선물. 옵션. 한국현대사. 중국근대사. 세계사. 러시아 혁명. 네트워크 마케팅. 해외배낭여행. 복잡성이론. 정신분석....
내 갈급한 갈증들을 적셔주는 별스럽고 이질적인 묵직한 책들 사이에 끼인 몇권의 아내의 책들. 그것들은 전혀 다른 빛을 띠고 있었다. 내 실존적인 몸부림을 반영하는 관심 전체를 비웃으며,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를 휘발성을 품고 있었다. ‘내가 나를 놓아버릴까봐 겁이 나’라고 힘없이 내뱉던 아내의 말 그대로, 숨이 멎을듯한 고뇌 속에 가장 소중한 생명마저 툭 버리고 말 것같은 불길함을 주는 책들이었다.
나는 아내의 책들을 꺼내 소파로 가져왔다. 한권 한권 아내가 줄 친 곳들을 읽어나가는 동안 마음 속에 전율이 흘렀다. 닥터 최의 아내로부터 맨처음 전화 받을 때의 지진같은 충격이 되살아났다. 전혀 회복 불가능한 단절의 저쪽 실체에 돌연 눈이 떠진 기분이었다. 내 눈을 둘러싼 환영이 걷히고, 아내 가슴 속의 검고 칙칙한 폐광이 있는 그대로 보이는 듯했다. 안을 들여다볼 수조차 없을 정도로 매캐한 유황냄새로 가득찬.
카레이서 되는 게 꿈이라고 아내는 말했었다. 시속 수백킬로 속도로 생명을 걸고 달리는 카레이서. 그 말을 듣는 순간, 경악이 일었다. 그녀의 꿈이 카레이서인 적이 있었던가. 최근에 급조된 꿈이었다. 술에 취한채 심야의 고속도로를 시속 백오십, 백육십 킬로로 내달리며 길들여진.
뒤죽박죽으로 얽혀버린 혼란의 무게에 압사 당할듯한, 가슴 밑바닥이 뚫려 지친 영혼의 물감이 질질 새나갈 것 같은 아내....
길이 없다. 지금까지 다다른 곳은 처음만 못하다. 반성도, 인내도, 그 어떤 숨떨림도, 지옥같은 몸부림도 소용없다....모든 것은 이미 결판이 나 있어요...나는 당신의 동의를 얻으러 온 것이 아니라, 통보하러 온 것이오...계엄군 군화소리....시간 속의 절연체....단절....이미 떠난 사람이에요.....불가능....완전한 이별....죽음....매몰....불연속....한 세계의 종말....내 인식의 바깥.....저쪽의 실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