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다시 시에 빠져 미칠지도 몰라”
마지막 돌파구로 삼은 S경제연구소에 떨어진 후였던가 전이었던가. 동료들과 마신 술에 취해 밤늦게 들어와, 방을 닦고 있던 아내에게 불쑥 이런 말을 던진 것은 무슨 의미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하루하루가 답답하고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 막막함 속에, 시를 다시 쓸 생각이 전혀 없던 내가 무심코 내뱉은 말이었다. 그때 무심코 던진 말이 지금과 같은 파탄의 시작이 될 줄은 그때는 몰랐다.
청춘 시절 혼자 좋아서 쓰는 것과 결혼 후 쓰는 것이 다른 줄은. 내 기질상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자의식의 독에 빠질 가능성이 크고, 한번 빠지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끝장을 보고야마는 성격이었으니. 내게 있어 시는 소통이 아니라 단절이며, 시를 다시 쓰는 그 시점이 바로 단절의 시작이란 사실을 그때는 몰랐다. 그 결과가 이렇게 뒤늦게, 내 시의 배타성에 피멍 들도록 얻어맞아 달아난 아내에게, 또 면목없게 핏물 든 펜을 들어 눈물겨운 애정 시를 쓰는 것이라니!
1997. 10. 22. 밤 11시. 집에서
결혼 십년째 하는 은혼식은 없을까. 백화점에서 ‘은혼식 하나 주세요’ 하면, 예쁘게 포장해주는 그런 상품은 없을까.
밤 늦은 시간. 결혼 앨범을 꺼내 다시 본다. 지금까진 내 시각으로만 보았는데, 아내의 눈으로 사진들을 본다. 신랑은 굳어있다. 신부는 웃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당황한 빛을 감추고 있다. 언젠가 아내가, 결혼 앨범은 보기 싫다고 하던 때가 떠오른다. 앨범을 덥고 생각에 잠긴다.
은혼식의 앨범은 완전히 새롭게 찍을 것이다. 아내의 미소를 되돌려주고, 아내 가슴에 수선화 피게 할 것이다. 꽃의 앨범 찍을 것이다.
은혼식으로 새로 태어난 우리. 하객들의 축하 박수. 나, 그대 눈빛에 입 맞추고, 그대 손가락에 내 따스한 입김의 다이아 반지 껴주며, 그대와 곱게 맞절하고, 그대의 면사포 안 다정하게 바라보리라.
그대, 지금 누워있다. 아픔의 침대에 병들어 있다. 결혼 초부터 침대에서 자고 싶어 했던 그대. 온돌만 고집하는 남편에 순종해 침대의 낭만 잃어버린 그대 아름다운 여체가, 죽음의 침대에 누워있다. 이런 식으로 소망이 이루어지다니. 너무 코믹하지 않은가. 너무 슬프지 않은가.
아내의 건강이 나빠지고 있었고, 신경이 병적으로 과민해졌다. 성냥갑 속의 성냥처럼, 사소한 불씨에도 몸 전체가 파삭 타버릴 것같은 극도의 파열성과 휘발성을 띠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아내에 대한 이해와 위로, 설득, 호소, 그 남자와의 담판, 관용 등 일체의 수단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죽음 앞의 모든 형용사가 공기에 물감을 칠하듯 무의미한 것처럼.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아내가 돌아올 때 문 열어 주고, 아이들에게 엄마의 부재를 덜 느끼도록 챙겨주고, 그리고 심정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마음의 문을 조용히 닫고 이렇게 글쓰기에 정진하는 것뿐이다. 마음이 흘러가는 물결의 청정함에 가만 귀 기울이는 것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