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핌=황의영기자] "직접 의사결정을 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일반 기업은 상부 지시를 따르는 피동적인 면이 있는 데 증권업은 시장과 나의 싸움이잖아요. 여기에 매력을 느꼈죠."
이병익 오크우드투자자문 대표(사진)가 증권업계에 발을 들이게 된 이유는 단순하면서도 뚜렷했다. 고객자산을 운용하는 데 모든 책임을 지고 그에 따른 결정을 직접 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이 그가 수많은 직종 중 증권업을 택하게 된 계기였다.

이 같은 성격 때문에 또 한번 사고(?)를 쳤다. 박현주 미래에셋그룹 회장과 함께 미래에셋자산운용을 창업한 데 이어 1999년 당시 '박현주펀드'를 운용해 100%가 넘는 수익률로 스타매니저가 됐던 그가 창업을 선언한 것이다.
이유는 하나였다. '최고의 헤지펀드 운용사를 만들겠다.'
헤지펀드는 투자자 모집이나 펀드 설립, 투자 전략 등 모든 면에서 아무런 제한을 두지 않는 걸 말한다. 헤지펀드는 일반적으로 소수의 투자자들로부터 자금을 받아(사모), 그보다 많은 돈을 빌리고(레버리지) 주식 채권 파생상품 원자재 인수합병(M&A) 등 다양한 투자상품에 투자전략을 실행, 목표한 수익률을 올리는 것을 말한다.
이 대표의 헤지펀드 꿈은 아직 국내의 제도가 이를 허용하지 않아 유보해놓은 상태다. 대신 준비단계라 할 수 있는 투자자문사를 설립했다.
◆ 자본시장의 역사를 쓴다
그는 연세대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후 1990년 대우증권에 입사하면서 증권업계에 입문했다. 투자분석부에서 자동차와 제약, 전기전자(IT), 철강 등 산업 분석을 맡았던 그는 1997년 한남투자신탁으로 자리를 옮겼다. 시장과 직접 겨루는 펀드매니저가 그의 천성과 맞았기 때문이다.
이어 1998년 박현주 미래에셋그룹 회장과 함께 미래에셋자산운용의 창립했고, '박현주 펀드'를 운용해 일약 스타매니저로 우뚝 섰다.
"미래에셋자산운용을 설립할 때 우리에게는 꿈이 있었어요. 대한민국 자본시장의 역사를 우리가 쓴다는 공감대가 있었죠. 펀드를 운용할 때도 정말 열심히 했습니다."
1999년 당시 '박현주 펀드'의 수익률은 105~114%를 기록, 코스피지수 상승률(46%)을 두 배 이상 초과하는 성과를 올렸다. 비결은 그해 코스피지수의 연중 저점과 고점을 다섯 번 연속으로 맞춘 것이다.
"당시 미래에셋은 '3투신'에 비해 규모가 작아 시장을 주도할 입장이 아니었어요. 철저하게 우량주 중심으로, 성장주에 투자했던게 잘 맞았죠."
그는 박현주 회장과의 인연을 소중하게 여기고 있다. 박 회장의 투자철학과 색깔에 맞는 사람을 기용하는 것 등을 배웠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일에 대한 열정을 닮았다.
이 대표는 증권가에서 워커홀릭으로 유명하다. 자신이 좋아하고,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은 일이 아니라 휴식이라는 게 그의 지론이다. 이는 회사 직원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 대표는 "회사를 처음 설립할 때 초심을 잃지 말자는 뜻에서 사명을 '오크우드(참나무 숲)'로 지었다"며 "오크트리(참나무)가 아닌 오크우드로 지은 이유는 나 혼자가 아닌 우리 모두가 함께 꿈을 이루기 위해서"라고 힘줘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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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핌 Newspim]황의영 기자 (apex@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