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착한 인생, 당신에게 배웁니다 : 시골의사 박경철이 만난 아름다운 사람들
박경철 저 | 리더스북 ㅣ 1만원
가발 할머니에게 의사가 물었다.
"할머니, 그거 왜 쓰고 다니세요?"
"왜? 원장님이 가발 하나 해줄겨?"
가발 할머니는 언제나 사이즈도 맞지 않고 어울리지도 않는 가발을 하고 다니셨다.
그러던 어느 날은 가발을 훌렁 벗으시는데 머리가 거의 다 빠진 상태였다. 부분탈모가 아주 심했다.
"할머니, 머리가 왜 이러세요?"
"아, 이거? 영감이 다 뽑아서 그랴. 원장님도 알다시피 우리 영감이 치매잖어? 매일같이 머리채를 쥐고 흔들어 대는데 머리카락이 남아날 턱이 있나."
할머니는 태연하게 가발을 바로잡으며 오히려 짖궂은 미소를 지으셨다.
"아 영감이 이제 늙어서는 머리채를 뽑아대네. 그게 다 피가 드러버서 그렇대."
의사도 할아버지가 치매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또 할머니가 지극정성으로 할아버지를 보살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할아버지가 할머니 머리를 다 뽑다시피 한다는 얘기는 처음이었다.
할아버지가 젊은 시절에 도박과 알코올 중독에 빠져 할머니 속을 썩혔다는 것 역시 상상도 못했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그렇게 속을 썩이셨는데 지금 왜 그렇게 잘 해드리십니까?"
"아, 그게 다 피 때문이랴."
할아버지가 사고를 당해서 수술을 받게 되었을 때 혈액형이 RH-형이어서 겨우 피를 구해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고 한다. 알고보니 그렇게 드문 피였다는 것이다.
"세상에 없는 그 희귀한 '드러븐' 피를 타고 났으니 얼마나 억울하겠어? 그 피가 몸에 돌아다녀서 그런 건데. 영감이 저렇게 술도 먹고 험한 소리도 하지만 어디 저게 본심이겠나 말이야."
할아버지가 다 '드러분' 피를 타고난 억울한 팔자라서 그런 거라고 여기니 오히려 할아버지가 그렇게 불쌍하고 안돼 보이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때부터 할머니는 할아버지를 미워하지 않고 그저 안타깝다 여기고 보살피신다고 했다.
"그 피가 정말로 그렇게 드러분 피가 맞는 거재?"
"예 맞아요. 그래요, 할머니. 그거 드러분 피예요."
그렇게 말하며 웃으시는 할머니의 미소가 너무 고마웠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피 때문에 그런 거 맞아요. 피만 아니면 할아버지도 참 좋은 분이었을 거예요! 할머니"
의사는 가발 할머니의 미소에 답하듯 그렇게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