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결론: 글로벌 위기의 관리
지금까지 우리는 ‘버냉키 시대’의 개막을 맞아 그의 새로운 전략과 향후 정책 행보를 탐색하기 위해 얼마간의 시도를 풀어 왔다. 일련의 신뢰도 시험을 대체로 무난하게 통과하면서 대체로 ‘B+’ 이상의 합격점을 받고 있지만, 정작 그의 시대에 대한 본격적인 시험은 이제부터다.
사실 지금까지는 그린스펀의 후광 하에서 이른바 ‘포스트 그린스펀 시대’ 자신의 좌표와 행로를 찾는 일종의 암중모색이 버냉키호의 기본 진로였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제 집권 2년차에 들어 선 버냉키 시대 연준의 진정한 쟁점과 도전 혹은 시험은 무엇인가?
(1) 버냉키 시대의 미래 지향적 세 가지 쟁점
지금 시장에서는 버냉키호의 진로와 관련해 무엇보다 미국 경제의 연착륙 향방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하지만 사실상 ‘금리 전망의 불확정적 경로’에 기반한 버냉키의 예의 “인내심있는 접근”은 여전히 부동산 경기 향방과 유가 반락의 역풍(특히 유동성 붐과 관련해), 그리고 노동시장 경색의 후유증 등과 결부된 각종 “위태로운 균형”으로 가득 차 있고, 또 시장의 “미온적인 존경”에만 그치고 있다.
오늘날 ‘이행기’ 미국 경제의 진로는 결코 단순한 순환적 차원의 쟁점이 아니다. 여기서는 지금까지의 논의를 기반으로, 대신 크게 세 가지 정도의 미래지향적인 쟁점을 상정해 볼 수 있다. 이는 결국 “버냉키노믹스”의 실효성에 대한 문제다.
첫 번째는 무엇보다 ‘전망 기반 패러다임’의 본격화와 정교화라 할 것이다.
학계의 심도깊은 연구 성과와 정책 현실의 역동적이고 생생한 경험을 바탕으로 버냉키는 이미 그 자체로 미래지향적인 정책 틀, 혹은 통화정책 운영체계를 정립해 나가려 하고 있다. 물론 여기서 당연히 각종 데이터 분석, 혹은 그의 표현대로 ‘현황 분석’이 중요한 위상을 점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는 세간에서 이해되고 있는 바와 같은 (단순한 차원의) ‘데이터 의존 전략’과는 격이 다를 것이다. 사실 “데이터의 중요성은 무엇보다 그것이 전망에 대해 지니는 함의, 그리고 성장 및 인플레에 대한 정책 결정가들의 최상의 추측을 확증짓는(혹은 기각하는) 정도에 의존한다”. 다시 말해 “어떤 면에서 가장 중요한 통계는 전망”이라는 것.
데이터에 대한 버냉키의 이런 접근법은 역시 그린스펀과는 적어도 그 무게중심에서 다소 차이를 보인다.
사실 ‘데이터의 마스터’로 이름 높은 그린스펀은 무엇보다 데이터의 한계와 맹점을 포착하고, 나아가 이른바 “누락 변수”를 찾는 데 부심해 왔다. 이를 ‘데이터에 대한 리스크 관리 접근’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대신 버냉키의 경우에는 ‘데이터에 대한 전망 기반 접근’이라고 말이다.
물론 버냉키도 최근 들어 미국의 경상적자나 생산성 문제와 관련해 이런 누락 변수 한 가지를 제기해 주목을 끈다. 가령, ‘무형 투자’ 문제가 바로 그것인데, 아직은 신중한 문제제기에 그치고 있다. “지적 대범함”으로 알려진 그이지만, 통화정책 결정의 디테일한 측면, 특히 “현황 분석”에서는 아직도 한참 배워야 할 것이 많은 모양이다.
하지만 버냉키의 이런 접근 방식에는 크게 두 가지 취약점이 있다.
우선, 전망을 중시하면서 미래지향적인 시장 데이터의 정보 함의를 특권화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이는 자칫 그가 시장을 추수하는 이른바 “버냉키 콜”의 함정에 빠질 가능성을 환기시킨다.
다른 한 가지는 전망 기반 패러다임이 지니는 고도의 내공을 감안할 때, 정작 자신의 의중과 시장 간에 잠재적 충돌의 여지를 지닌다는 점이다. 심지어 ‘내세’마저 ‘할인’해 오늘의 가격에 반영하는 단기주의 속성 혹은 근시안주의와, 전반적으로는 ‘합리적 태만’ 하에 특정한 재료에만 집착하는 과민 반응을 감안할 때 시장이 과연 버냉키 시대의 전망 기반 패러다임을 제대로 소화할 수 있을지, 혹은 소화불량에 걸리지는 않을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두 번째는 연준의 민주화와 커뮤니케이션 진작을 위한 한층 강화된 행보라 할 수 있다.
개인숭배와도 가까웠던 그린스펀 시대의 유제를 떨쳐 버리고 ‘위원회’로서 연준의 위상을 재정립하고자 하는 그의 시도는 연준 내 민주화의 진전이라는 점에서 일단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또 대외적으로도 ‘신비의 베일’을 벗어내고 연준을 투명하고 개방적으로 만들려는 노력 역시 호평을 듣는다.
물론 그 기준은 그저 ‘말’을 많이 하는 것 혹은 수사법의 세련화보다는 자신의 목표와 전망, 그리고 이른바 ‘반응함수’(reaction function)를 명시화하고 구체화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나아가 이를 기반으로 중기적인 인플레이션 목표와 같은 ‘정량적 앵커’(quantitative anchor)에 대해서도 신중하면서도 점차 전향적인 태도가 예상된다.
그러나 여기서도 일종의 ‘역풍’이 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사실 모든 전망에 내재되기 마련인 불확실성의 여과없는 노출은 더욱 혼선만 조장할 공산만 크다. 이는 결국 시장으로부터 신뢰성 상실이라는 대가를 치루게 된다. 게다가 연준 의사결정의 민주화가 도리어 마에스트로의 퇴장 이후 지도력의 실종, 나아가 정치력의 공백으로 귀결될 가능성도 유념해야 한다.
실제로 미국의 오묘한(?) 민주주의 전통, 즉 “견제와 균형”은 이론적 혹은 체계적인 것이기보다는 정책 현실에서 자연스레 비축된 것이다. 이것이 연준에게는 ‘의장의 권위’라는 관례로 정착돼 왔는데, 그 과정에서 의장의 탁월한 지도력은 또한 연준의 독립성을 지탱한 담보였다고 할 수 있다. 아직 이를 대체할 안전장치는 마땅치 않은 실정이다.
사실 중앙은행의 독립성이라는 것은 “정부로부터의(from) 독립”이 아니라 “정부 내(within) 독립”이라는 게, 또 “목표 독립성”이 아니라 “수단 독립성”이라는 게 컨센서스다. 최종 목표를 설정하는 데 있어서는 국가의 기본 정책 방향에 입각해야 하지만, 이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의 활용은 전적으로 독립적이어야 한다는 것.
하지만 말이 쉽지 제도적으로 선을 긋기란 어려운 법이다. 따라서 독립성이라는 것은 현실적으로, 특히 정치적으로 관리되어야 한다. 그리고 통화정책의 대상이 고립무원의 영역이 아니며, 정치적 현실, 가령 지정학적 리스크 등도 본래 중요한 변수들이다. 결국 상당한 정치력, 그것도 의장의 능수능란한 기량과 리더쉽이 전제되어야 하지만, 아직은 버냉키에게 힘에 부치는 대목이다.
셋째는 학계 연구와 정책 현실 간에 새로운 컨센서스를 진척시켜 나갈 것으로 기대된다.
그리고 이는 비단 미국 내에만 국한되지 않고, 주요국 중앙은행들 간에 긴밀한 공조의 역사에 기반해, 이른바 ‘현대 글로벌 중앙은행 시스템’을 매개로 글로벌 경제 관리 영역 전반으로도 이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진정으로 이제 지난 20년 이상에 걸친 다양한 성과들을 체계화, 제도화하기 위해서는 글로벌 차원에서 ‘새로운 종합’이 절실해 지고 있고, 특히 버냉키가 그 과정을 선두에서 견인할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다. 미국 연준의 버냉키 시대는 결국 현대 글로벌 중앙은행 시스템의 재정비, 아니 제도화 시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 과정이 순탄하리라고 보기는 힘들다. 무엇보다 ECB와 같이 이미 연준의 글로벌 헤게모니와 겨룰(?) 새로운 막강한 파워가 스스로를 정립해 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중앙은행의 (중앙)은행’을 자임하는 BIS도 마찬가지다. 반면 ‘국제 금융 안정의 파수꾼’ IMF, 그리고 미국 재무부나 심지어 G-7의 위상은 연준의 그늘에 밀려나고 있지만 말이다.
좌우간 이런 가운데 버냉키 스스로가 오늘날 컨센서스라고 자임하고 있는 다양한 쟁점들에 대해 연준 내부적으로는 물론이고 ECB나 BIS 등과 상당한 수준의 접전이 벌어지고 있는 모습이다. 특히 대공황의 교훈에 천착한 버냉키의 입론은 아직도 진정으로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도전”에 강건(robust)하지는 못하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 BIS와 같은 경우는 이른바 ‘전간기’의 오스트리아 학파의 전통을 복원시키려는 시도를 보이고 있기도 하다.
여기서 쟁점은 크게 두 가지다. 우선, BIS가 도발적으로 제기한 질문처럼, ‘물가안정만으로 충분한가?
외견상 물가안정의 이면에 자리 잡은 각종 불균형의 누적, 그리고 연준이 주도한 글로벌 현대 중앙은행 시스템의 ‘수용적’ 정책과 결부된 금융시장 붐 앤 부스트 속성의 강화, 나아가 유가 등 상품 가격의 준동은 이제 그야 말로 “새로운 전투”를 요구한다고 할 수 있다.
두 번째 쟁점은 세계화 시대의 통화정책 문제다. 여기서 BIS는 세계화, 특히 ‘금융 세계화’ 시대 “과거의 게임 규칙의 변화”에 대해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다. 따라서 “글로벌 경제 동학” 혹은 로치 식으로는 “개방 거시경제학”, 특히 “통화정책 파급 메카니즘의 글로벌 차원”, 그리고 이와 연관된 통화정책 상의 각종 도전을 보다 잘 이해하고 또 이에 적절히 대처해 나가야 한다. 그러나 역시 당장에 명확한 답을 내릴 수 있는 문제는 거의 없다.
[뉴스핌 장보형 객원이코노미스트]
※본 특집의 저자인 장보형은 연세대학교 경제학과와 한신대 대학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지난 10여년간 국내 정보컨설팅 업체인 와이즈 인포넷에서 '국제금융/경제 팀장'을 맡아 국제 금융시장과 세계 경제 동향 점검 및 이슈 분석을 전담한 후, 현재는 '글로벌 마켓 이코노미스트'로서 프리랜서 활동을 하고 있으며, 올해부터 뉴스핌 객원 이코노미스트로 합류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