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부 가버린 시절,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다
-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1
그런 기억들이 있다. 어느 깊은 곳에 조용히 웅크리고 있다가, 생각지도 못한 순간 반짝하며 눈앞에 맞닥뜨리는. 사진 한 장, 노래 한 소절 때문에 문득 시절을 거슬러 떠오르는 기억들이 그렇다.
그 당시로서는 가슴 아팠지만 세월이 흐른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아름다움으로 여겨지는 기억들. 잊었던 순간들과 장소들이 불현듯 생생해져 손에 닿을 듯하다. 그러나 이제는 결코 돌이킬 수 없는 기억들이다. 하지만 그 슬픔과 열정, 갈망들을 가슴에 묻은 채 각자의 자리에 충실히 살아왔기에, 시간이 꽤 많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아름다운 추억으로 회상 할 수 있는 것이다.
첫사랑! 치기어린 소년시절, 연상의 여인에 대한 호기심이 크다. 특히 여선생님에 대한 관심이 크다. 좋아하는 선생님 곁에 서는 일은 아예 짜릿한 고문이었다. 선생님이 말을 걸거나 머리를 쓰다듬고 등을 토닥거릴 때면 더욱 그랬다. 그때마다 얼굴이 붉어지고, 손과 발과 등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리곤 했다. 이와는 또 다르게 황순원의 「소나기」와 알퐁스 도데의 「별」을 읽으며 또래의 소녀에 대한 순수한 감정을 꿈꾸고 느끼기도 했다.
얼마 전 첫사랑을 소재로 한 ‘건축학 개론’이란 영화가 상영되어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었다. 지금은 아련하기만 한 과거의 내 모습과도 같은 그 기억들을 새로이 끄집어 내주었기 때문이다. 또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속설을 다시금 확인시켜 주기도 했다.
1993년 영화로 만들어진 ‘순수의 시대(The Age of Innocence)’ 마지막 장면은 매우 인상적이다. 사랑하던 사람이 곁을 떠나고 십 수 년이 흐른 뒤, 주인공은 그녀가 살고 있는 곳을 찾아가보게 된다. 그러나 그녀를 실제로 만나지는 않았다. 대신 저 먼발치에서 그녀가 살고 있는 아파트 창문커튼이 펄럭이는 모습만 바라보면서 조용히 돌아선다.
그리운 사람을 지금에 와서 재회할 경우, 아니 만난 것 보다 못한 경우가 많다. 자신의 가슴에는 너무나 아름답고 애절한 모습과 기억으로 남아있지만, 현실은 세월이 흐르는 동안 새로운 색상으로 덧칠되거나 퇴색되기도 하여 모든 것이 너무나 달라져 있다. 낡고 주름 잡혀 초라한 모습... 애틋하던 그 감정들이 한순간에 송두리째 날아가 버릴지도 모른다. 이제 그 사람은 ‘옛님’ 일 뿐이다.
흔히들 첫사랑은 깨어진다고 한다. 그러기에 더욱 애잔하고 오랫동안 아니 한평생동안 가슴에 남아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첫사랑이 마지막 사랑으로 완성되기도 한다. 영화 ‘레터스 투 줄리엣(Letters to Juliet)’ 은 이런 스토리를 담았다.
영화는 아름다운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제는 할머니가 된 한 여인이 50년 전에 별다른 이유 없이 헤어지게 된 첫사랑을 찾아 나선다. 우편번호부에서 첫사랑의 이름으로 되어있는 주소들을 찾아 이곳저곳을 방문해본다. 희미한 기억을 바탕으로 옛날 두 연인이 다정한 시간을 나누었던 포도농원들도 찾아 헤맨다. 아직도 그 사람이 자신을 사랑하고 있을까하는 기대감을 안고서...
그러나 50년의 세월이 흐른지라 옛날 기억을 되살리기가 쉽지 않다. 문득 자신의 모습이 우스워질 때도 있었다. 그러나 단념하지 않았다. 마침내 5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첫사랑의 얼굴을 대면하는 순간, 둘은 아직도 서로 사랑하고 있음을 확인한다. 영화는 이렇게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누군가 첫사랑이 잘살면 배 아프고, 못살면 가슴 아프고, 같이 살면 머리 아프다고 말했다. 이래저래 첫사랑은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 당신은 지금 첫사랑과 함께 같이 살고 있나요?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2 에서 계속)
*저자 이철환 프로필
-재정경제부 금융정보분석원장
-한국거래소 시장감시위원장
-현 하나금융경영연구소 초빙위원
-현 단국대 경제학과 겸임교수(재직)
*저서- 과천청사 불빛은 꺼지지 않는다, 한국경제의 선택, 14일간의 경제여행, 14일간의 (글로벌)금융여행 등 다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