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핌=송협 기자]“지독하게 가난했던 70년대...서울역 대우빌딩은 가난이 지겨워 낯선 서울에서 터전을 마련코자 시골에서 상경한 사람들을 제일 먼저 반겨주는 서울의 첫 관문이자 삶의 희망이었습니다”
지난 30년간 서울역 명물로 위상을 떨쳤던 옛 대우빌딩이 ‘서울 스퀘어’로 재탄생되는 순간을 바라보는 서울역 토박이 김순철(63세)씨의 얼굴에는 역사 속으로 떠나버린 대우빌딩에 대한 그리움과 아쉬움이 함께 묻어났다.
1975년 2월 대우개발이 발주하고 대우건설에 의해 착공을 시작한 대우빌딩은 2년 후 1977년 6월11일 완공됐다. 공사비는 당시 기준으로는 최대 규모인 194억4250만원으로 대우건설의 총 본사이자 1만여명의 상주인원이 근무했다.
옛 대우빌딩을 추억하는 50~60대 세대들은“가난을 피해 서울에서 정착하기 위해 시골에서 상경한 사람들이 서울역 앞 대우빌딩의 웅장함에 놀라움을 금치 못할 정도로 웅장했다”고 회고했다.
◆ 대우빌딩 이렇게 탄생됐다

그렇다면 대우빌딩은 어떻게 탄생됐을까? 대우빌딩의 역사는 철권통치로 서슬이 시퍼렇던 1963년 3월 박정희 정부가 서울역 일대의 근대화 및 철도의 획기적인 발전을 위해 서울역 맞은편에 지하2층~지상23층 연건평 3만6000여평 규모로 특급호텔 및 사무실, 백화점을 포함한 복합빌딩으로 종합교통센터 건립에 착수하면서 시작됐다.
당시 이 건물은 지상 5층 내외장 공사는 물론 12층까지 골조공사가 이미 진행된 상태에서 화재 및 사업비 부족 등을 이유로 1971년 11월 공사가 일시 중단됐다. 하지만 공사 중단 과정에서 지하2층과 지상 3층까지 부분 개관 되면서 교통부, 철도청, 서울 지방철도청과 2개의 식당, 2개의 다방이 입주됐다.
1972년 하반기 정부는 철도청의 재산처분 결정에 따라 교통센터 건물을 매각키로 하고 원매자를 물색, 매각절차가 진행됐지만 3차례의 공개입찰에도 불구하고 응찰자는 쉽게 나타나지 않았다. 사정이 다급해진 정부는 대기업들을 대상으로 교통센터 건물 인수를 종용하면서 결국 1973년 5월 대우개발이 매입하면서 중단됐던 공사가 재개됐다.
정부의 매입 강요로 대지 3752평, 매입금액 47억948만원에 교통센터를 매입한 대우개발은 당초 대우가 관광업 진출을 위해 73년 초 설립한 회사로, 대우개발을 통해 교통센터를 인수한 대우는 용도변경과 함께 74년1월부터 재설계를 착수했고 그해 12월 철도청으로부터 건물 및 토지를 완전히 인수하고 본격적인 시공단계에 접어들었다.
◆ 47억원에 인수한 교통센터를 대우센터로 개칭
정부로부터 47억원에 교통센터를 매입한 대우개발은 1975년 1월12일 본사 사무실을 교통센터로 이전한데 이어 대우실업 본사도 합류하게 된다. 그로부터 10일이 지난 1월22일 종전의 교통센터는 대우센터로 개칭됐다.
대우센터로 개칭된 구 교통센터는 설계와 보완을 위해 건물 전체를 오피스빌딩으로 건립하는데 결론 짓고 당시 프로젝트 총괄 책임자인 홍성부 상무의 주도로 일본 토쿄 ‘가즈미가세키’빌딩을 모델로 서울역 명물인 대우빌딩 건립을 위해 박차를 가했다.
대우센터 건설공사는 1975년 5월9일 박노성 회장을 비롯해 김우중 사장, 대우개발, 대우실업 전임직원과 관계회사 임직원 다수가 참석한 가운데 성대하게 치뤄졌는데 이미 23층까지 철골골조 공사를 마무리한 상태였다.
각고의 노력 끝에 대우센터는 착공 28개월만인 1977년 6월12일 준공됐다. 투입된 총 공사비는 200억원이었으며, 63빌딩이 건립되기 전 서울에서 연면적이 가장 큰 빌딩으로 손꼽혔다.
◆ 옛 대우빌딩 최고기록 보유 빌딩으로 ‘주목’
대우센터는 1990년대 첨단화된 대형 빌딩이 들어서기 이전까지 여러가지 최고 기록을 보유한 빌딩으로 유명하다.
가장 먼저 한층이 약 1200평 규모로 서울시 전체를 통틀어 가장 넓은 면적을 자랑했지만 사물실에는 기둥 하나 찾아볼 수 없었다.이는 철제 이동식 칸막이를 사용, 칸막이 변경이 언제든지 용이하고 공간 이용에 있어 효율적인 평면구조를 갖춰 당시로써는 획기적인 구조가 아닐 수 없다.
또 전층에 작동이 정확한 스프링쿨러 설비가 설치된 최신형 화재 감시기 및 경보시설과 130m높이 고층을 수교통으로 운영된 엘리베이터, 항상 냉방온돈 25도, 난방온도 22도, 상대습도 50%를 유지하는 공조시스템과 밝은 실내조명으로 사무실 분위기를 품위있게 현대적으로 설계했다.
이와 더불어 수도권 중심지로 철도, 전철, 버스 등 원스톱 교통생활권을 형성했으며, 차량 750대를 한꺼번에 수용할 수 있는 연건평 8000평의 주차빌딩을 갖춰 당시 최고의 빌딩으로 기록, 화제가 되기도 했다.
◆ 시대를 풍미했던 서울역 명물 대우빌딩...역사 속으로 사라져...

대우는 창업 이후 6년동안 셋방살이를 전전했다. 1966년 명동 동남도서 빌딩을 시작으로 을지로 동영빌딩, 1970년 다시 명동 성보빌딩에서 세들어 살던 대우는 1973년 대우센터 인근에 위치한 삼주빌딩을 인수하면서 대우빌딩이라는 문패를 걸고 자생한 대우는 5년이 지나지 않아 10만명의 가족을 거느린 국제적인 대기업으로 성장하게 된다.
대우빌딩 인근에서 33년째 식당을 운영하고 있는 박모(59세)씨는“대우빌딩은 당시 서울역 깡패들의 용돈벌이 수단으로 이용되기도 했다”면서“시골에서 상경한 사람들이나 시민들이 대우센터를 보고 있으면 대한민국 최고의 빌딩을 감상한 값을 지불하라며 갈취하는 행위가 많았다”고 회상했다.
유신정권의 철권통치와 지독히도 가난했던 70년대 서울의 관문이며, 삶의 터전을 버리고 무작정 서울로 상경한 순진한 시골 사람들의 희망이기도 했던 대우빌딩은 지난 1997년 IMF외환위기와 유동성 위기를 통해 1999년 8월 워크아웃 기업으로 선정됐다.
이후 김우중 회장의 수조원대 비자금 조성 및 탈세 행적이 속속 밝혀지면서 본격적인 쇠퇴기(衰退期)에 접어 들었고, 급기야 2006년 금호아시아나그룹에게 매각에 이어 이듬해 2007년 외국계 금융그룹 모건스탠리에게 9600억원에 매각되는 비운을 맞았다.
30년 넘게 수많은 사람들의 희망,서울의 상징으로 70년대를 풍미했던 서울역 앞 옛 대우빌딩은 현재 지하2층~지상23층, 건물 외벽 전면에 LED(발광다이오드)조명, 스피드 게이트, 컨퍼런스 룸, 피트니스센터, 등 다양한 미디어아트가 표현되는 ‘서울 스퀘어’빌딩으로 리모델링 되면서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지난 30년간 서울역 명물로 위상을 떨쳤던 옛 대우빌딩이 ‘서울 스퀘어’로 재탄생되는 순간을 바라보는 서울역 토박이 김순철(63세)씨의 얼굴에는 역사 속으로 떠나버린 대우빌딩에 대한 그리움과 아쉬움이 함께 묻어났다.
1975년 2월 대우개발이 발주하고 대우건설에 의해 착공을 시작한 대우빌딩은 2년 후 1977년 6월11일 완공됐다. 공사비는 당시 기준으로는 최대 규모인 194억4250만원으로 대우건설의 총 본사이자 1만여명의 상주인원이 근무했다.
옛 대우빌딩을 추억하는 50~60대 세대들은“가난을 피해 서울에서 정착하기 위해 시골에서 상경한 사람들이 서울역 앞 대우빌딩의 웅장함에 놀라움을 금치 못할 정도로 웅장했다”고 회고했다.
◆ 대우빌딩 이렇게 탄생됐다

그렇다면 대우빌딩은 어떻게 탄생됐을까? 대우빌딩의 역사는 철권통치로 서슬이 시퍼렇던 1963년 3월 박정희 정부가 서울역 일대의 근대화 및 철도의 획기적인 발전을 위해 서울역 맞은편에 지하2층~지상23층 연건평 3만6000여평 규모로 특급호텔 및 사무실, 백화점을 포함한 복합빌딩으로 종합교통센터 건립에 착수하면서 시작됐다.
당시 이 건물은 지상 5층 내외장 공사는 물론 12층까지 골조공사가 이미 진행된 상태에서 화재 및 사업비 부족 등을 이유로 1971년 11월 공사가 일시 중단됐다. 하지만 공사 중단 과정에서 지하2층과 지상 3층까지 부분 개관 되면서 교통부, 철도청, 서울 지방철도청과 2개의 식당, 2개의 다방이 입주됐다.
1972년 하반기 정부는 철도청의 재산처분 결정에 따라 교통센터 건물을 매각키로 하고 원매자를 물색, 매각절차가 진행됐지만 3차례의 공개입찰에도 불구하고 응찰자는 쉽게 나타나지 않았다. 사정이 다급해진 정부는 대기업들을 대상으로 교통센터 건물 인수를 종용하면서 결국 1973년 5월 대우개발이 매입하면서 중단됐던 공사가 재개됐다.
정부의 매입 강요로 대지 3752평, 매입금액 47억948만원에 교통센터를 매입한 대우개발은 당초 대우가 관광업 진출을 위해 73년 초 설립한 회사로, 대우개발을 통해 교통센터를 인수한 대우는 용도변경과 함께 74년1월부터 재설계를 착수했고 그해 12월 철도청으로부터 건물 및 토지를 완전히 인수하고 본격적인 시공단계에 접어들었다.
◆ 47억원에 인수한 교통센터를 대우센터로 개칭
정부로부터 47억원에 교통센터를 매입한 대우개발은 1975년 1월12일 본사 사무실을 교통센터로 이전한데 이어 대우실업 본사도 합류하게 된다. 그로부터 10일이 지난 1월22일 종전의 교통센터는 대우센터로 개칭됐다.
대우센터로 개칭된 구 교통센터는 설계와 보완을 위해 건물 전체를 오피스빌딩으로 건립하는데 결론 짓고 당시 프로젝트 총괄 책임자인 홍성부 상무의 주도로 일본 토쿄 ‘가즈미가세키’빌딩을 모델로 서울역 명물인 대우빌딩 건립을 위해 박차를 가했다.
대우센터 건설공사는 1975년 5월9일 박노성 회장을 비롯해 김우중 사장, 대우개발, 대우실업 전임직원과 관계회사 임직원 다수가 참석한 가운데 성대하게 치뤄졌는데 이미 23층까지 철골골조 공사를 마무리한 상태였다.
각고의 노력 끝에 대우센터는 착공 28개월만인 1977년 6월12일 준공됐다. 투입된 총 공사비는 200억원이었으며, 63빌딩이 건립되기 전 서울에서 연면적이 가장 큰 빌딩으로 손꼽혔다.
◆ 옛 대우빌딩 최고기록 보유 빌딩으로 ‘주목’
대우센터는 1990년대 첨단화된 대형 빌딩이 들어서기 이전까지 여러가지 최고 기록을 보유한 빌딩으로 유명하다.
가장 먼저 한층이 약 1200평 규모로 서울시 전체를 통틀어 가장 넓은 면적을 자랑했지만 사물실에는 기둥 하나 찾아볼 수 없었다.이는 철제 이동식 칸막이를 사용, 칸막이 변경이 언제든지 용이하고 공간 이용에 있어 효율적인 평면구조를 갖춰 당시로써는 획기적인 구조가 아닐 수 없다.
또 전층에 작동이 정확한 스프링쿨러 설비가 설치된 최신형 화재 감시기 및 경보시설과 130m높이 고층을 수교통으로 운영된 엘리베이터, 항상 냉방온돈 25도, 난방온도 22도, 상대습도 50%를 유지하는 공조시스템과 밝은 실내조명으로 사무실 분위기를 품위있게 현대적으로 설계했다.
이와 더불어 수도권 중심지로 철도, 전철, 버스 등 원스톱 교통생활권을 형성했으며, 차량 750대를 한꺼번에 수용할 수 있는 연건평 8000평의 주차빌딩을 갖춰 당시 최고의 빌딩으로 기록, 화제가 되기도 했다.
◆ 시대를 풍미했던 서울역 명물 대우빌딩...역사 속으로 사라져...

대우는 창업 이후 6년동안 셋방살이를 전전했다. 1966년 명동 동남도서 빌딩을 시작으로 을지로 동영빌딩, 1970년 다시 명동 성보빌딩에서 세들어 살던 대우는 1973년 대우센터 인근에 위치한 삼주빌딩을 인수하면서 대우빌딩이라는 문패를 걸고 자생한 대우는 5년이 지나지 않아 10만명의 가족을 거느린 국제적인 대기업으로 성장하게 된다.
대우빌딩 인근에서 33년째 식당을 운영하고 있는 박모(59세)씨는“대우빌딩은 당시 서울역 깡패들의 용돈벌이 수단으로 이용되기도 했다”면서“시골에서 상경한 사람들이나 시민들이 대우센터를 보고 있으면 대한민국 최고의 빌딩을 감상한 값을 지불하라며 갈취하는 행위가 많았다”고 회상했다.
유신정권의 철권통치와 지독히도 가난했던 70년대 서울의 관문이며, 삶의 터전을 버리고 무작정 서울로 상경한 순진한 시골 사람들의 희망이기도 했던 대우빌딩은 지난 1997년 IMF외환위기와 유동성 위기를 통해 1999년 8월 워크아웃 기업으로 선정됐다.
이후 김우중 회장의 수조원대 비자금 조성 및 탈세 행적이 속속 밝혀지면서 본격적인 쇠퇴기(衰退期)에 접어 들었고, 급기야 2006년 금호아시아나그룹에게 매각에 이어 이듬해 2007년 외국계 금융그룹 모건스탠리에게 9600억원에 매각되는 비운을 맞았다.
30년 넘게 수많은 사람들의 희망,서울의 상징으로 70년대를 풍미했던 서울역 앞 옛 대우빌딩은 현재 지하2층~지상23층, 건물 외벽 전면에 LED(발광다이오드)조명, 스피드 게이트, 컨퍼런스 룸, 피트니스센터, 등 다양한 미디어아트가 표현되는 ‘서울 스퀘어’빌딩으로 리모델링 되면서 역사속으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