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핵심 요약
beta- 통일부는 30일 1991~1993년 남북 핵문제 협의 문서를 공개했다.
- 김일성은 1992년 남북회담에서 핵 개발 의사와 필요가 없다며 동족 향한 핵무기 개발은 상상도 못할 일이라 말했다.
- 그러나 북한은 남북 핵사찰 방식·시한·시범사찰을 끝내 거부하고 팀스피리트 중단을 연계 압박하다 1993년 핵확산금지조약에서 탈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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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핵화 공동선언 채택 6일 만에 완료
북한 1차 회의부터 사찰 전면 거부
팀스피리트 훈련 빌미로 협상 인질
사찰 규정 한 줄 합의 못하고 결렬
[서울=뉴스핌] 김현구 기자 = 1992년 김일성 북한 주석은 한국 대표단에 북한이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지 않으며, 동족을 향한 핵개발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이후 한국 측의 사찰 방식은 전면 거부했다.
통일부는 30일 8차 남북회담 문서로 남북대화사료집 14권 일부와 남북대화 사료집 회의록 17~20권을 공개했다. 공개된 문서는 1991년 12월부터 1993년 1월까지 핵문제 대표접촉 3회, 남북핵통제공동위원회 구성·운영 대표접촉 7회, 핵통제공동위 회의와 위원접촉 22회 등 모두 32차례에 걸친 협의 과정을 담고 있다.

◆ 김일성 "동족 멸살 핵무기 개발 상상도 못할 일"
비핵화 공동선언은 1991년 12월 26일부터 31일까지 불과 6일간 3차례 대표접촉을 통해 채택됐다. 한국 대표는 임동원·이동복, 북측 대표는 최우진과 북한 대남 협상의 핵심 인물인 김영철이었다. 3차 접촉 당일 총 6차례 정회를 거치며 7시간 30분 만에 6개항 합의 및 가서명이 이뤄졌다.
핵무기 시험·제조·보유·사용 금지, 핵재처리시설과 우라늄농축시설 불보유, 비핵화 검증을 위한 상호 핵사찰 실시 등을 담은 공동선언은 1992년 2월 19일 발효됐다. 한국 측은 비핵화공동선언 가서명 이후 1992년 팀스피리트 훈련도 중단했다.
공동선언 발효 직전인 1992년 2월 18일, 김일성은 6차 남북고위급회담 기간 중 한국 대표단과의 면담에서 "우리에게는 핵무기가 없는 것은 물론 그것을 만들지도 않고 만들 필요도 없다"고 발언했다.
그러면서 "동족을 멸살시킬 수 있는 핵무기를 개발한다는 것은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며 "우리는 주변의 큰 나라들과 핵대결을 할 생각이 없으며 이에 대해 누구도 의심을 가질 수 없을 것"이라고도 했다.
하지만 이행을 담보할 사찰 협상은 처음부터 삐걱댔다. 핵통제공동위 구성·운영 합의서를 마련하는 7차례 대표접촉에서 북한은 사찰규정 시한을 명기하자는 한국 측 요구에 '빠른 시일 내'라는 표현으로 우회하며 핵통제공동위로 넘기자는 주장을 반복했다.
시범사찰 포함 여부도 끝내 북측이 거부해 최종 합의서에 담기지 못했다.

◆ 北, 주한미군 동시사찰 요구하고 IAEA 사찰 후엔 상호사찰 무용론 주장
북한은 1992년 3월 판문점에서 열린 핵통제공동위 제1차 회의부터 한국 측이 제안한 사찰 방식을 전면 거부했다. 한국 측이 정기사찰·특별사찰 구분과 상호주의·동수사찰 원칙을 제시하자 북한은 동수사찰은 현실을 무시한 고집이라며 절대 불가 입장을 내세웠다.
북한은 시범사찰에 대해서도 불필요하다고 주장했고, 특별사찰은 '비핵화공동선언 위반'이라는 논리를 내세워 거부했다. 대신 주한미군 핵무기·핵기지에 대한 전면 동시사찰을 요구하며 사찰의 초점을 한반도 내 미군으로 돌리려 했다.
북한은 사찰규정 토의에 앞서 '비핵화공동선언 이행합의서'를 먼저 채택해야 한다는 전제조건을 내걸어 협상 자체를 지연시켰고, 한국 측은 이를 조기사찰 회피 태도 및 지연전술 구사라고 판단했다.
한국 측은 5차 회의에서 제7차 고위급회담 합의를 상기시키며 당일 문안정리를 촉구했지만 북한은 이행합의서 미제시를 이유로 협의를 거부했다.
1992년 5월 말부터 6월 초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영변 등 14개 지역을 대상으로 핵사찰을 실시하자 북한은 논리를 바꿨다. IAEA 사찰로 핵개발 의혹이 이미 해소됐다고 주장하며 남북 상호사찰의 필요성 자체를 부정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한국 측은 "IAEA 사찰은 남북 상호사찰을 대체할 수 없다"며 맞섰지만 이후에도 북한은 이 논리를 반복하며 실질 토의를 회피했다.

◆ 9~13차 회의 연속 무산…"12월 15일까지 팀스피리트 철회하라" 시한 압박까지
북한은 1993년 팀스피리트 훈련 재개가 결정되자 이를 빌미로 "팀스피리트를 강행하면 모든 남북대화와 핵통제공동위를 무산시키겠다"며 협상 자체를 볼모로 삼았다. 9차부터 13차까지 5차례 회의가 연속으로 팀스피리트 논쟁에 잠식되며 사찰규정 토의 자체가 무산되는 악순환이 반복됐다.
9차 회의에서 북한은 ▲24차 한미연례안보협의회 합의를 11월 말까지 철회·공포할 것 ▲외국 핵무기·장비가 동원된 군사연습을 한반도에서 실시하지 말 것 ▲비핵화공동선언 이행합의서와 사찰규정 토의 교착상태 타결을 위한 건설적인 안을 내놓을 것 등 3개항 요구를 내걸었다.
12차 회의에서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주한미군 핵무기·핵기지 전면사찰을 조건 없이 수용할 것, 남측 핵무기 개발 진상을 해명할 것을 추가로 요구하면서 "12월 15일까지 팀스피리트 재개 결정을 철회하라"는 시한부 압박까지 가했다.
한국 측이 "사찰규정 채택 후 상호핵사찰이 실시되면 팀스피리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며 출구를 제시했지만 북한은 끝내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1993년 1월 25일 마지막 위원장접촉에서도 북한은 "팀스피리트 훈련을 실시하면 북남관계와 합의서를 파탄으로 몰아넣는 결과가 될 것"이라고 위협하며 차기 접촉 일정 합의조차 거부했다. 결국 북한은 같은 해 3월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선언했다.
hyun9@newspim.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