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핵심 요약
beta- 국제갤러리가 7월 19일까지 구본창 기획 사진전 '진동하는 사물들'을 개최했다.
- 9인 사진작가가 테크놀로지보다 사물과의 관계와 응시를 중시한 정물사진 연작을 선보였다.
- 이번 전시는 존재·부재·사라짐을 탐구하며 사물에 응축된 시간과 시적 잔향을 포착했다.
!AI가 자동 생성한 요약으로 정확하지 않을 수 있어요.
-사진가 구본창이 기획하고 참여한 사진전, 정희승 김경태 구성연 등 9명 참여
[서울=뉴스핌]이영란 편집위원/미술전문기자=여기 붉은 컵을 포착한 한 점의 묘한 사진이 있다. 토마토주스가 굳은 걸까, 피가 엉겨붙은 걸까. 유리컵 안쪽에는 알 듯 모를 듯한 무수한 흔적들이 있어 보는 이의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알 수 없는 미묘한 흔적과 시간성을 품은 오브제를 강렬한 정물사진으로 담아낸 이는 사진가 구본창(b.1953)이다.

몇년 전 구본창은 일본의 한 카페에서 계산대 옆에 놓인 이 컵을 발견했다. 고객이 유난히 많은 카페에서 직원이 붉은 색연필로 주문표를 작성한 후, 색연필을 급하게 컵에 다시 꽂는 바람에 붉은 흔적들이 생겼다. 수백, 수천 번 색연필을 꽂다 보니까 생긴 핏빛같은 자국인 것이다. 별 것 아닐 법한 이 컵을 발견한 구본창은 '도저히 그냥 두고 나올 수가 없어' 인근 문구점으로 달려갔다. 그리곤 색연필 한 다스를 산 후 일회용 컵을 빼앗듯 가져와 훗날 찍은 것이다.
작가 구본창은 "컵을 본 순간 '아, 뭐가 되겠다'라는 직감이 왔습니다. 박서보 선생이 그린 수고스러운 붓질도 떠올랐구요. 그래서 빨간색 연필 12자루를 사주고 한국으로 데려왔지요. 이 작품은 그렇게 탄생했습니다. 이처럼 저한테는 수집한 물건이 하나 하나 영감을 주곤 합니다."라고 했다. 이 핏빛 유리컵 사진을 촬영한 구본창이 후배 작가들과 함께 기획전을 펼친다. 구본창은 전시 기획도 하고, 자신도 한명의 작가로 전시에 작품을 출품했다.
국제갤러리는 오는 7월 19일까지 K1과 K2에서 사진 기획전 '진동하는 사물들(Objects in Oscillation)'을 개최한다. 구본창이 기획과 작가 선정 등을 맡은 이 전시에는 동시대 한국 사진작가 9인이 참여해 자신들의 정물사진들을 출품했다. 사진기획전이 흔치 않은 국내 미술계 상황에서 사진가가 직접 기획전을 큐레이팅하고, 저마다 개성있는 사진작업을 하는 작가들의 작업을 한데 모은 것은 의미가 남다르다.
이번 전시는 사진 매체 고유의 표현을 탐색하는 동시에, 어떻게 내 앞의 사물과 관계맺을 것인지를 질문하고 있다. 최근들어 미술계와 사진계에서는 디지털 이미지 기술이 나날이 진화하고 빠르게 확산되면서 디지털 후보정이라든가 인공지능(AI) 기반의 이미지 생성과 보정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전시 참여작가들은 이같은 최신 테크놀로지와 AI에 의존하기 보다는 자신의 눈과 감각, 카메라의 광학적 기술을 이용해 이미지를 만들어내는데 집중하고 있다.
작가이자 기획자, 그리고 교육자이기도 하면서 사진이 한국현대미술의 주요 장르로 자리매김하는 데 중심 역할을 해온 구본창은 동료 사진가들을 한자리에 초대하는 한편, 자신의 정물작업을 K1 전시장에 선보이고 있다. 먼저 그의 '오브제' 연작을 보자. 자세히 봐야 파악이 될 법한 이 아스라한 연작은 새틴천을 두른 사각의 빈 상자를 촬영한 작품이다. 은수저라든가 수저포크 세트, 초컬릿 같은 내용물이 빠져나간 자리를 음각으로 간직한 이 상자들은 존재와 부재, 주연과 조연의 관계를 차분히 되묻는다.
이렇듯 간과되는 존재들에 대한 구본창의 애정은 '컬렉션' 연작에서도 이어진다. 작가는 우연히 마주한 사물들을 수집하고 응시하면서 이를 정성껏 촬영함으로써 각각의 사물이 간결하게 정돈된 무대에서 스스로 고유한 이야기를 드러낼 수 있도록 이끈다.

같은 공간에 자리한 정희승 작가의 사진도 매혹적이다. 날이 시퍼렇게 서있는 미니멀한 사진들은 예리함과 함께 많은 함의를 품고 있음을 확인케 한다. 정희승에게 사진이란 우연한 순간과 이를 필연적 이미지로 변모시키고자 하는 시도 사이에서의 망설임이다.
그는 이번에 선보인 새 연작 '병렬투영'(2026)에서 19세기 프랑스 시인 스테판 말라르메의 시집 '주사위 던지기'(1897)를 사진적으로 번안했다. 정희승은 시인의 시를 사진 매체의 존재론에 대한 사유로 풀어내고 있다. 우연이라는 절대적 심연에 대한 수학적 탐구를 시적 언어에서 이미지로 번역하며, 정희승은 시의 다층적 상징성과 불가해성에 대한 사유를 촉발하는 오브제들을 보여준다. 나아가 원본텍스트의 개념과 사진 이미지를 어느 한 소실점에서도 만나지 않고 평행하게 나아가는 병렬관계에 놓기 위해, 소실점을 발생시키지 않는 투시도법인 '병렬 투영'의 구도를 택했다. 우연과 필연 사이를 차분하게 '진동'하는 정희승의 이번 작품은 사진 매체의 고유성과 형이상학적 사유를 정교하게 직조하고 있다.

K1 앞쪽 전시장에 자리한 조성연 작가의 '사라지지 않고 무언가의 일부가 된다', '우연한 때에 예기치 않았던' 연작은 일상에서 마주하는 사소한 존재들과 교감하며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은 작업이다. 작가는 도시 주변부에서 채집한 콘크리트조각, 철근, 전선, 기계부품, 식물잔해 등을 자유롭게 재조합해 그 안에 잠재된 가능성을 이끌어냈다. 따라서 그의 작품은 계산된 연출의 결과라기보다는 작가가 사물과 함께한 시간과 인연이 빚어낸 집합체다. 그 우연적 균형 속에서 사물들은 또다른 생명력을 발현한다.
K2 1층 전시실에는 김수강 작가의 조용한 작품이 관객을 맞는다. 작가는 일상의 모퉁이에 놓인 사물들, 즉 병, 돌, 종이가방 등을 명상하듯 들여다보며 그 안에 깃든 아우라를 드러냈다. 특히 작업에 고유의 질감을 부여하는 '검프린트(gum print)' 기법을 사용해 빈티지 작업같은 느낌을 준다. 이는 종이에 물감을 넣은 용액을 바르고 빛을 쬐어 물 속에서 현상하는 과정을 여러 번 반복해 색조를 구현하는 정교한 수작업이다. 이를 통해 회화적인 물성을 입은 그의 사진은 가장 적당한 무게로 사물의 비가시적인 내면을 조용히 비춘다.

반면에 바로 옆 김경태 작가의 사진은 강렬한 임팩트를 선사한다. 작가는 사진을 중첩하고 합성하며 렌즈 초점의 한계를 넘어서는 이미지를 구축한다. 이번 사진은 아주 작은 너트를 어마어마하게 확대하고, 이미지의 극한을 보여줘 놀라움을 준다. 김경태는 피사체에 점진적으로 접근해 수백 장의 사진을 촬영한 후, 각 사진에서 초점이 가장 선명하게 맞는 부분들만 합성하는 '포커스 스태킹' 기법을 사용했다. 이 과정을 거치면 화면의 모든 지점에 고르게 초점이 맞는 선명한 이미지가 탄생한다. 이렇게 완성된 연작 'Brass Hex Nut'(2016)은 너트 표면의 질감을 극대화한 작품으로, 전시장에서는 석 점의 대형사진을 나란히 배치해 시선과 초점이 이동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박찬우 작가 역시 중첩기법을 활용하지만 그의 목적은 경험이 축적되며 남는 '기억의 흔적'을 드러내기 위해서다. 이번 전시에 작가는 조선시대 '책거리' 형식을 차용한 작품을 출품했다. 책거리가 당대 지식과 취향을 진열하기 위해 가장 '좋은' 물건들을 그려넣은 조선민화의 한 장르였다면, 박찬우는 '좋음'의 기준을 상품성이나 물질 자체의 특성이 아닌 경험의 축적으로 바라보고, 그의 책장에 사용흔적이 묻은 일상용품을 병치했다. 이 사물들은 다시점 방식으로 중첩 촬영돼 하나의 고정된 위계나 관점을 거부하고 있다.

오랫동안 캔디를 활용한 작업으로 잘 알려진 구성연의 신작 '설탕' 연작은 그간의 작업에서 진일보한 면모를 보여준다. 작가는 설탕으로 정교하게 조각한 황금빛 보물과 장식을 카메라에 담았다. 이 낯설고 중첩된 모사물들은 마치 실제처럼 보이면서도 동시에 녹아내리는 형상이 실제와의 간극을 드러낸다. 결국 보는 이의 판단을 유예시키며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달콤하고 유리처럼 반짝이지만 이내 사라질 운명을 지닌 설탕 오브제 사진은 실제와 가상, 영원과 순간, 이상과 허상의 경계에서 인간의 끝없는 욕망을 조명한다.
K2의 2층 전시실에서는 '사라짐'에 대한 성찰이 담긴 작품들이 나왔다. 정정호 작가는 한국전쟁 당시 노무자였던 할아버지의 삶을 추적하고 사진으로 기록했다. 작업을 위한 조사과정에서 자료 부족과 접근이 제한된 장소에 맞닥뜨린 작가는 사라진 역사를 외부 정보로 메우기보다, 현재 자신의 시선으로 재해석하고자 했다. 탄피, 철사, 끈, 아카이브 문서, 아버지의 군대사진 등 수집한 오브제들을 재구성해 촬영함으로써 전쟁 속 잊힌 개인의 작은 역사를 복원한 것. 조사, 수집, 조합을 거친 긴 작업과정은 지워져 버린 존재들과 연결돼 이들을 사유하는 시간이며, 최종 결과물인 사진은 그 모든 간절한 행위의 증표로 남았다.

마지막 파트의 조선희 작가의 사진은 부재와 소멸을 탐구하고 있다. 그의 'Black Imago'(2024–2025) 연작은 시들어가는 꽃의 외피에 화장의 재를 연상시키는 검은 안료를 입혀 촬영한 것이다. 검게 뒤덮인 꽃은 생명력과 기능이 휘발된채 무기질의 고요한 질감으로 응축됐다. 사진은 이 마지막 모습을 물질적 기록으로 붙들고 있다. 작가의 또다른 연작인 'Planet'(2024–2025)는 조금씩 썩어가며 형태가 뭉그러지는 과일들을 작은 행성처럼 포착해 이채롭다. 작가는 생의 기능을 다한 이후에도 지속되는 물질의 상태를 조명하며, 죽음을 끝이 아닌 또 다른 미학적 상태로 전이되는 순간으로 기록했다.
이렇듯 이번 '진동하는 사물들'의 9인의 참여작가들은 정지된 듯 고요하지만 저마다의 깊고 내밀한 울림으로 지구에 존재하는 다양한 사물의 시적 잔향을 차분히 포착하고 있다. 관찰과 응시, 어루만짐과 사유가 응축된 작가들의 사진 속에는 사물들이 간직해온 고유의 시간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전시는 7월 19일까지. 무료관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