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유럽의 균열과 한국의 생존 전략
이탈리아 피렌체에 있는 유럽대학연구소(European University Institute, EUI)는 유럽연합(EU)의 전략적 자율성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는 지적 산실이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담론들은 최근 몇 년 사이 급격한 패러다임의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대서양을 사이에 둔 미국과 유럽의 결속이 과거와 같은 무조건적 혈맹에서 이익 기반의 냉혹한 전략적 선택으로 변모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2025년 하반기부터 본격화된 파행적 균열은 단순한 이견을 넘어 이제 체제적 분리로 치닫고 있다.
뉴욕타임스(NYT) 2025년 10월 14일자 보도는 이러한 균열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미 행정부가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의 후속 조치로 자국 내 생산 비중을 더욱 강화하는 가이드라인을 발표하자, 프랑스 르몽드(Le Monde) 2025년 11월 2일자는 엘리제궁의 반응을 빌려 미국이 동맹국의 산업 기반을 공동화시키며 경제적 약탈자로 돌변했다고 강력히 비판했다. 세계 최대 경제 대국인 미국과 거대 단일 시장인 유럽연합(EU)의 갈등은 이제 단순한 이견을 넘어 글로벌 공급망의 파편화를 의미하며, 이는 한국과 같은 중견 강국에 전례 없는 선택의 압박을 가하고 있다.
갈등의 근본 원인은 안보와 경제의 결합이다. 워싱턴포스트(WP) 2025년 12월 5일자 분석 기사는 "이제 안보는 더 이상 무상 공공재가 아닌 수익자 부담의 유료 서비스로 변질되었다"고 평하고 있다. 미국은 나토(NATO) 회원국들에 방위비 분담금을 GDP 대비 3% 이상으로 증액할 것을 요구하며, 이를 이행하지 않을 경우 유럽 주둔군을 인도-태평양 지역으로 재배치하겠다는 카드를 꺼내 들었다. 이에 맞서 독일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FAZ) 2025년 12월 20일자 사설은 미국 없는 유럽 안보(Security without America)는 이제 생존의 필수 과제라며 방위 산업 자립을 촉구했다.
이러한 대서양의 균열은 우크라이나 전쟁의 장기화 과정에서 더욱 선명해졌다. 미국 의회 내 고립주의 세력은 우크라이나 지원 예산을 전략적 카드로 활용하며 유럽의 안보는 유럽이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는 논리를 확산시키고 있다. 이는 단순한 예산 삭감의 차원을 넘어, 2차 세계대전 이후 대서양 동맹을 지탱해온 자유주의 안보 질서가 근본적으로 해체되고 있음을 상징한다. 유럽 각국은 미국의 독자적인 종전 협상 추진이 우크라이나의 주권을 훼손할 뿐만 아니라, 동유럽 전체를 러시아의 확장주의 위협 앞에 방치하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라며 강력히 반발하고 있다.
이 지점에서 한국의 지정학적 고민은 깊어진다. 한국은 한미 동맹의 심화를 통해 핵잠수함 건조를 위한 기술 협력 및 원자력 추진체 도입 등 핵심 안보 자산을 확보해야 하는 상황이다. 미국의 기술 패권 질서에 깊이 통합되어야 하면서도, 동시에 유럽이 세운 탄소국경조정제도(CBAM)와 같은 규제 장벽을 넘어야 하는 이중 과제에 직면해 있다. 미국의 동맹 관계는 한 층 더 심층적으로 발전시키면서도, 유럽을 핵심 파트너이자 공존 관계로 확대해야 하는 정교한 외교적 줄타기가 요구되는 시점이다.
유럽대학연구소(EUI) 산하 로버트 슈만 연구소의 에릭 존스(Erik Jones) 소장은 최근 발표한 전략 보고서를 통해 지정학적 패러다임의 근본적 전환을 선언했다. 그는 과거의 동맹이 적대적 세력이라는 공통의 적에 기반했다면, 미래의 동맹은 기술과 환경이라는 공통의 표준(Common Standards)에 기반할 것이라고 통찰했다. 미국은 첨단 기술 표준을 통해 공급망의 위계화를 시도하고 있으며, 유럽은 환경 및 인권 규범을 통해 새로운 시장 진입 장벽을 구축하고 있다. 이 거대한 두 성벽 사이에서 한국은 어느 한 쪽에 매몰되기보다 두 표준을 연결하고 통합하는 기술적 교량(Technical Bridge) 역할을 자처해야 한다. 한미 동맹을 통한 안보적 실익을 극대화하면서도, 유럽의 규범적 파트너로서 지위를 공고히 하여 규제 리스크를 시장 선점의 기회로 바꾸는 것, 그것이 2026년 이후 한국 외교와 통상이 나아가야 할 정교한 생존 문법이다.
무역의 무기화와 경제 국수주의: 2026 Risk Map
유럽대학연구소(EUI) 산하 로버트 슈만 센터가 최근 발표한 '2026 리스크 맵: 파편화된 질서의 항해'는 현 대서양 질서를 '구조적 디커플링의 고착화'로 진단했다. 에릭 존스 국장은 보고서의 핵심 챕터인 '공급망 안보와 대서양의 불확실성'을 통해 미국 중심의 공격적 보조금 정치가 유럽의 첨단 제조 인프라를 얼마나 심각하게 잠식하고 있는지 구체적 지표로 입증했다.
존스 소장의 분석에 따르면,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법(IRA)과 반도체법(CHIPS Act) 강화의 여파로 2025년 한 해 동안 유럽에서 미국으로 이동하거나 계획된 배터리 및 미래차 관련 자본은 무려 4,200억 달러에 육박한다. 이로 인해 유럽 내 핵심 제조 산업의 성장 동력은 당초 전망치보다 약 18%가량 위축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러한 산업 공동화의 공포는 유럽연합으로 하여금 탄소국경조정제도(CBAM)를 단순한 환경 규범을 넘어, 미국의 보호주의에 대응하는 강력한 규제적 관세 장벽이자 산업 방어 기제로 전면화하게 만드는 배경이 되고 있다.
탄소국경조정제도(CBAM)는 이제 한국 수출 기업들에게 가상의 위협이 아닌, 재무제표를 뒤흔들 실질적인 비용 폭탄으로 다가오고 있다. 구체적인 데이터를 통해 그 파급효과를 시뮬레이션해 보자. 한국 철강 기업이 연간 약 300만 톤의 제품을 EU 시장에 수출한다고 가정할 때, CBAM이 본격 적용되는 2026년 기준 EU 탄소배출권(EUA) 가격이 톤당 110유로에 달하고 국내 탄소배출권(K-ETS) 가격이 20유로 수준에 머문다면, 우리 기업은 톤당 90유로에 달하는 탄소 가격 차액을 메우기 위해 인증서를 구매해야 한다. 이는 매년 약 2억 7,000만 유로, 한화로 약 4,000억 원을 상회하는 직접적인 지출이 발생함을 의미한다. 이는 단순히 영업이익의 감소를 넘어, 탄소 경쟁력이 곧 가격 경쟁력으로 직결되는 무역 질서의 거대한 개편을 상징한다.
철강뿐만 아니라 알루미늄, 비료, 시멘트, 수소 등 대상 품목이 확대됨에 따라 한국 산업계가 짊어져야 할 비용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ISS 보고서인 '무역의 무기화와 신통상 질서'는 유럽이 이러한 규제를 통해 역외 국가들의 제조 공정을 유럽 표준에 강제로 맞추도록 유도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이는 한국 기업들에게 공정 설비의 전면적인 교체와 저탄소 기술 도입이라는 막대한 투자 압박을 가한다.
여기에 유럽판 IRA로 불리는 탄소중립산업법(NZIA)과 핵심원자재법(CRMA)은 미국의 자국 우선주의에 대한 방어적 맞대응 성격이 짙지만, 그 파고는 고스란히 한국의 배터리 및 소재 공급망으로 향하고 있다. 유럽은 이제 단순한 소비 시장을 넘어, 역내 제조 역량 40% 확보와 특정국 원자재 의존도 65% 미만 축소라는 가이드라인을 통해 강력한 공급망 역내화(On-shoring)를 요구하고 있다. 이로 인해 한국 기업들은 미국의 IRA 보조금 요건을 충족하기 위한 북미 투자와 더불어, 유럽의 규제 장벽을 넘기 위한 역내 생산 기지 및 리사이클링 생태계 구축이라는 중복 투자 리스크에 직면했다. 이는 기업의 자본 효율성을 저해하는 동시에, 글로벌 공급망이 파편화된 블록 경제 시대로 완전히 진입했음을 공표하고 있다.
따라서 한국은 미국과의 첨단 기술 동맹을 강화하여 반도체 및 AI 분야의 패권을 공유하되, 유럽의 규범 질서 내에서는 친환경 표준을 선제적으로 수용함으로써 규제 리스크를 시장 점유율로 전환하는 역발상이 필요하다. 유럽은 규범을 만드는 세력이고, 미국은 기술을 선도하는 세력이다. 한국은 미국의 기술력을 바탕으로 유럽의 규범을 충족시키는 유일한 신뢰할 수 있는 제조 국가로서의 지위를 굳혀야 한다.
ISS 안보 보고서와 K-방산: 안보 자립의 기회와 동맹의 딜레마
대서양의 균열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지점은 경제적 마찰의 수준을 넘어선 안보의 단층선이다. 유럽안보연구소(EUISS)가 발간한 전략 보고서 '전략적 자율성을 넘어: 2026 유럽 안보의 새로운 지평'은 나토(NATO) 내부의 결속력이 약화되는 실질적 공동화 현상을 심도 있게 해부하고 있다. 본 보고서의 주저자인 조반니 그레비(Giovanni Grevi) 선임연구원은 핵심 챕터인 '안보 분담금과 자국 우선주의의 충돌'을 통해, 미국이 인도-태평양 지역으로 전략적 자원을 집중함에 따라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유럽 내 안보 공백이 더 이상 가상의 시나리오가 아닌 현존하는 위협임을 경고한다. 이는 유럽이 미국의 안보 우산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방위 역량을 구축해야 한다는 '전략적 자립'의 요구로 이어지고 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의 국방 예산 우선순위가 아시아로 급격히 이동하면서 유럽 주둔 미군의 전력 투사 능력이 상대적으로 약화되었고, 이는 유럽 국가들로 하여금 미국 없는 안보(Security without America)를 위한 독자적인 방산 공급망 구축을 강제하고 있다. 이러한 거대한 전환기에 한국의 방위산업, 즉 K-방산은 유럽 안보의 실질적 구원투수로 급부상했다.
구체적인 팩트를 살펴보자. 영국 더 선(The Sun) 2025년 11월 30일자 보도는 "폴란드가 도입한 한국산 K2 전차와 K9 자주포가 나토 동부 전선의 실질적 억제력이 되고 있으며, 이는 독일과 프랑스의 방산 패권을 위협하는 수준"이라고 분석했다. 실제로 지난 3년간 한국이 폴란드와 체결한 약 150억 달러(약 21조 원) 규모의 계약은 단일 무기 수출로는 유례가 없는 기록이다. 또한 루마니아와 체결한 1조 원대 자주포 계약 및 에스토니아, 노르웨이 등으로 이어지는 K-방산의 행보는 유럽이 더 이상 서유럽 강대국들의 느린 인도 속도와 높은 가격에 의존하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명이기도 하다.
그레비 박사는 한국 무기 체계가 유럽 표준(NATO 표준)과 완벽히 호환되면서도 압도적인 생산 능력과 납기 대응력을 갖췄다는 점을 유럽 자립 안보의 핵심 요소로 평가한다. 하지만 이 기회는 동시에 한국에 고난도의 외교적 난제를 안겨 놓았다. 한국은 핵잠수함 건조를 위한 기술 협력 및 원자력 추진체 도입을 위해 미국의 기술적 동의와 전략적 승인이 필수적인 국가다.
현실적으로 워싱턴포스트를 비롯한 주요 외신들은 미국의 기술 통제 기조가 동맹국이라 할지라도 핵 추진 기술과 같은 전략적 자산에 대해서는 매우 보수적임을 거듭 강조해 왔다. 특히 최근 미국 내 안보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한국의 방산 수출 확대가 미국의 방위산업 점유율을 잠식할 수 있다는 우려와 함께, 이를 첨단 기술 이전이나 방위비 분담금 협상과 연계하려는 전략적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다. 한국은 유럽 시장에서의 방산 점유율을 확대하며 경제적 이득을 취하면서도, 미국의 핵심 안보 기술 통제 라인 내에서 협력을 고도화해야 하는 전략적 딜레마에 처해 있다. 즉, 유럽의 안보 자립 요구를 충족시키는 동시에 미국의 동맹 관리 능력을 시험하고 협력을 끌어내는 고도의 외교적 전술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복합 생존 전략: 미국과의 동맹 심화와 유럽과의 공존 확대
미국과 유럽의 특별한 관계가 종언을 고하고 각자도생의 길로 접어든 2026년의 신지정학적 질서 속에서, 한국의 선택은 이분법적 택일이 되어서는 안 된다. 미국의 동맹 관계는 한층 더 심층적으로 발전시켜 첨단 안보 자산을 확보하는 지렛대로 삼으면서도, 유럽을 핵심 파트너이자 공존 관계로 설정하여 외교적 영토를 넓히는 복합 생존 전략이 절실하다. 세 가지 전략이 고려 될 수 있다.
첫째, 안보적 차원에서의 불가역적 안보 공동체 구축이다. 폴란드, 루마니아 등에 대한 무기 판매는 단순한 상거래를 넘어선 전략적 결속이어야 한다. 현지 생산 공장 설립과 유지보수(MRO) 센터 구축은 한국의 방산 생태계를 유럽 내부에 깊숙이 이식하는 과정이다. 이를 통해 유럽 국가들이 미국의 압박 속에서도 한국과의 관계를 포기할 수 없게 만드는 구조적 의존성을 창출해야 한다. 이는 역설적으로 미국과의 협상에서 한국의 지정학적 가치를 극대화하여 핵잠수함 기술 협력과 같은 고난도 안보 과제에서 미국의 양보를 끌어낼 수 있는 강력한 레버리지가 될 것이다.
둘째, 경제적 차원에서의 규범 기반의 기술 교량 역할이다. 앞서 산출한 연간 수천억 원에 달하는 CBAM 비용을 극복하기 위해, 한국 기업들은 단순히 관세를 지불하는 수동적 대응에서 벗어나 유럽 내 친환경 에너지 기업들과의 전략적 합병이나 공동 연구를 활발히 전개해야 한다. 유럽의 규범 질서 속으로 침투하여 표준 전쟁에서 목소리를 내는 것은 미국 IRA 보조금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리스크를 분산하는 효과를 낸다. 미국과는 소형모듈원전(SMR) 및 항공우주 분야에서 기술 동맹을 맺고, 이 고도화된 기술력을 바탕으로 유럽의 탄소중립 시장 표준에 부합하는 제품을 공급하는 '삼각 협력 모델'이 가장 현실적인 대안이다.
셋째, 가치 기반 외교와 실용적 국익의 정교한 분리다. 미국은 강력한 대중봉쇄 참여를 종용하지만, 프랑스 르몽드(Le Monde) 2025년 12월자 기사가 지적하듯 유럽은 경제적 실리를 챙기는 '디리스킹(De-risking)' 전략을 고수하며 중국과의 소통 창구를 열어두고 있다. 한국은 이러한 양 진영의 전략적 온도 차를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유럽과 디지털 규범 및 공급망 다변화를 위한 고위급 상설 채널을 가동함으로써, 미국의 일방주의가 한국의 국익을 과도하게 침해할 때 이를 견제하거나 우회할 수 있는 외교적 자율성을 확보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미국과 유럽의 갈등은 한국에 위태로운 도전이지만, 우리가 준비된 실력을 갖추고 있다면 두 개의 거대 시장과 두 개의 안보 자산을 동시에 확보할 수 있는 기회의 창이 된다. EUI와 ISS의 분석이 경고하듯 파편화된 세계 질서 속에서 승자는 동맹에 맹목적으로 의존하는 국가가 아니라, 동맹을 활용해 자신의 표준을 관철하는 국가다. 미국의 안보 우산을 더욱 견고히 다져 핵 억제력의 실효성을 높이면서도, 유럽의 규범 질서와 안보 수요에 부합하는 핵심 파트너로서 지위를 굳히는 정교한 복합 외교만이 한국이 가야 할 유일한 길이다. 이제 관성을 버리고 냉혹한 현실 위에 한국만의 새로운 대전략을 설계해야 할 때다.

*필자 최연혁 교수는 = 스웨덴 예테보리대의 정부의 질 연구소에서 부패 해소를 위한 정부의 역할에 관한 연구를 진행했다. 스톡홀름 싱크탱크인 스칸디나비아 정책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매년 알메랄렌 정치박람회에서 스톡홀름 포럼을 개최해 선진정치의 조건에 대해 함께 고민하고 그 결과를 널리 설파해 왔다. 한국외대 스웨덴어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정치학 석사 학위를 받은 후 스웨덴으로 건너가 예테보리대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고 런던정경대에서 박사후과정을 거쳤다. 이후 스웨덴 쇠데르턴대에서 18년간 정치학과 교수로 재직했으며 버클리대 사회조사연구소 객원연구원, 하와이 동서연구소 초빙연구원, 남아공 스텔렌보쉬대와 에스토니아 타르투대, 폴란드 아담미키에비취대에서 객원교수로 일했다. 현재 스웨덴 린네대학 정치학 교수로 강의와 연구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저서로 '우리가 만나야 할 미래' '좋은 국가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민주주의의가 왜 좋을까' '알메달렌, 축제의 정치를 만나다' '스웨덴 패러독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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