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성세대, 청년에게 사고방식 강요 말아야" 강조
솔직함과 프로 정신, 모든 후배들에게 귀감
'직진 순재' 별명은 왕성한 호기심의 산물
[서울=뉴스핌] 오광수 문화전문기자 = "기성세대가 (청년들에게) 할 일은 뭐냐. 그 발판을 깔아주는 거예요. 사고나 사상, 가지고 있는 인식 이런 걸 애들한테 물려주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건 신세대를 오염시키는 거예요." - 한 인터뷰 중에서.
![]() |
| [서울=뉴스핌] 오광수 문화전문기자 = 연극 '리어왕'에 출연한 이순재. [사진 = 연우무대] 2025.11.25 oks34@newspim.com |
70년 배우 인생을 마감하고 하늘로 떠난 고(故) 이순재는 단순한 배우이기에 앞서 우리에게 삶에 대한 자세를 몸소 가르쳐주고 떠난 어른이었다. 그가 남긴 자취를 더듬으면서 말로가 아닌 행동으로 우리에게 가르쳐준 것들을 되짚어 본다.
▲ 남들과 똑같은 길은 가지 않는다
이순재는 한국전쟁 당시 피난 시절 대전고등학교를 거쳐 서울고등학교 재학 중에 학생들을 모아 연극반을 만들어 연기를 시작했다. 서울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해서는 서울대 연극회를 창립, 유치진의 '조국'으로 연극경연대회에 참가했다. 그러나 그 당시 배우는 그저 '딴따라'이자 '광대'로 인식됐던 시절이었다. 이순재는 이런 세간의 평에 굴하지 않았다. 좋은 학력을 팽개치고 과감하게 연기의 길을 택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찾아나선 것이다.
이순재는 2024년 9월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기다리며'와 KBS가 2024년 9월 첫 방송한 시트콤 '개소리'의 주연으로 활약했다. 국내 최고령인 구순(九旬)의 연기자 이순재는 백상연기상과 KBS에서 연기대상을 받았다.
"올해 90세가 됐고 1956년 데뷔한 69년 차 연기자로 연기를 잘하는 배우가 되고 싶습니다. 연기가 쉽지 않습니다. 평생 했지만, 아직도 안 되고 모자란 부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늘 연구하고 고민하며, 새로운 배우가 나올 때마다 참고합니다. 배우는 연구와 공부를 계속해야 합니다." - 2024년 5월, '60회 백상예술대상' 시상식에서.
"오래 살다 보니 이런 날이 온다. '언젠가는 기회가 한 번 오겠지' 하면서 늘 준비하고 있었는데 오늘, 이 아름다운 상, 귀한 상을 받게 됐다. 60이 넘었다고 주는 공로상이 아니다. 연기를 잘해서 주는 상이다." - 2024년 'KBS 연기대상' 소감.
남들과 똑같은 길이 아닌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평생 열정을 바친 결과, 그는 '죽을 때까지 현역'이고 싶다는 소원을 완성했다.
![]() |
| [서울=뉴스핌] 오광수 문화전문기자 = 수많은 드라마에서 시청률 고공 행진을 이끈 배우 이순재. 2025.11.25 oks34@newspim.com |
▲ '야동 순재'는 솔직함과 소탈함의 결과
이순재는 MBC '거침없이 하이킥'을 통해 '야동 순재'라는 별명을 얻었다. 극중 야한 비디오를 보다가 가족들에게 발각되는 바람에 망신을 당하는 장면 때문에 얻은 별명이었다. 이순재는 "아무리 시트콤이지만 저런 것까지 해야 되나 생각했다. 예전 같았으면 못한다고 했을 것이다. 동창들이 욕할 줄 알았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이순재는 언제나 솔직했다. 후배들에게도 어른 대접을 받으려 하기보다는 언제나 먼저 다가갔다. 70이 넘어서 무대에 올랐던 이순재는 언제나 후배들의 귀감이 됐다. 2012년 연극 '아버지' 공연 도중 세트에 부딪혀 많은 피를 흘렸지만 끝내 치료를 거부하고 무대를 마쳤다. 2008년 모친상을 당했지만, 오전에는 장례식장을 지키고 오후에는 연극무대에 올랐다. 관객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이를 본 후배들이 이순재의 프로정신에 혀를 내둘렀다는 후문이다.
2023년에는 엄청난 대사량으로 젊은 배우들도 엄두를 내지 못하는 '리어왕'에 도전, 관객들로부터 기립박수를 받았다. 89세의 이순재가 펼친 리어왕 연기는 세계 최고령 기록으로 기네스북 등재가 추진되고 있다.
▲ '직진 순재'의 힘은 끊임없는 호기심
이순재는 연극, 영화, 드라마뿐만 아니라 예능 프로그램에서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 2013년부터 방영됐던 리얼 버라이어티 여행 프로그램인 '꽃보다 할배'에 출연, '직진 순재'라는 별명을 얻었다. 예능 프로그램 속에서 이순재는 누구보다 먼저 앞장서서 박물관과 미술관, 여행지를 누볐다. 그가 건강해서라기보다 순전한 호기심의 결과였다. 넘치는 지적 호기심으로 가는 곳마다 가서 들여다보고 질문하는 이순재의 모습은 매우 인상 깊었다.
![]() |
| [서울=뉴스핌] 오광수 문화전문기자 = 'KBS 연기대상' 시상식 무대에 선 이순재(왼쪽)를 후배 연기자 최수종이 부축하고 있다. [사진 = KBS] 2025.11.25 oks34@newspim.com |
KBS '보통 사람들', 57.3%의 일일극 최고 시청률을 수립한 MBC '보고 또 보고', 64.8%의 역대 사극 시청률 1위에 오른 MBC '허준'에서 이순재는 독보적인 활약을 펼쳤다. 또 64.9%로 한국 TV 드라마 역대 2위 시청률을 기록한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 주연으로 출연, 후배 연기자들과 신화를 만들었다. 늘 스튜디오에서 이순재는 후배들을 다독이며 앞장서는 배우였다. 누구보다 먼저 대사를 암기하는 대선배를 보면서 후배들은 잠시도 게으름을 피우지 못했다. 지금 많은 후배 연예인들이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이유다.
▲ 저 세상에서도 연극 무대 꾸릴 것
지금은 사라진 TBC-KBS로 통폐합-에서 배우를 시작할 때 남자 배우는 이낙훈, 김동훈, 김성옥, 김순철, 오현경 등 6명이었다. 이순재가 맨 마지막으로 하늘의 부름을 받아 떠났다. 70년 동안 그는 연극, 라디오 연속극, TV·OTT 드라마, 영화를 통해 대중을 만났다. 100여 편의 연극과 170여 편의 드라마, 150여 편의 영화에 주·조연으로 출연했다. 이순재의 존재 자체가 한국 연극사일 뿐만 아니라 드라마사이다.
'허준'의 유의태, '거침없이 하이킥'의 순재, '풍운'의 대원군, '이산'의 영조, '리어왕'의 리어 같은 작품 속 캐릭터들은 여전히 우리 뇌리 속에 인상 깊게 남아 있다. 겨울비가 내리는 날 이 세상 소풍을 마치고 떠난 이순재. 저 세상에서도 친구들을 만나 좋은 작품 만들어 당장 무대에 서자고 하지 않을까. oks34@newspim.com
![]() |
| [서울=뉴스핌] 오광수 문화전문기자 2025.11.25 oks34@newspim.com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