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핌] 오영상 기자 = 일본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 속에 최근 몇 년 사이 빠르게 늘어난 일본 반도체 기업들의 신설 공장들이 정작 본격적인 가동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 인공지능(AI)용 반도체를 제외한 글로벌 수요 회복이 더디게 진행되면서 '개점휴업' 상태로 이어지는 곳이 늘고 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이 주요 반도체 업체 9곳을 조사한 결과, 2023년 이후 일본에서 완공된 반도체 공장 7곳 중 올해 4월 말 기준 양산에 돌입한 곳은 단 3곳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나머지 4곳은 시장 상황을 지켜보며 생산 일정조차 확정하지 못한 상태다.
대표적인 사례가 르네사스 일렉트로닉스다. 이 회사는 지난해 4월, 9년간 폐쇄했던 야마나시현 가이시 공장을 재가동했지만, 전기차(EV) 등에 쓰이는 반도체 수요가 기대에 못 미치면서 양산 시점을 당초 예정했던 2025년 초에서 늦춰야 할 처지다.
롬은 미야자키현 구니토미초 공장에서 2024년 11월부터 시제품 생산을 시작했지만 아직 양산 시점은 정하지 못하고 있다. 키옥시아는 지난해 7월 이와테현 기타카미시 공장의 2제조동을 완공했지만 가동은 오는 9월을 예정하고 있다.
양산에 돌입한 곳들도 본격적인 증산에는 소극적이다. 소니그룹은 2023년 말 신설한 나가사키현 이사하야시 공장에서 이미지 센서를 생산하고 있지만, 아이폰 판매 부진과 중국 스마트폰 업체들의 현지 조달 전환 등으로 추가 설비 투자에는 신중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이 같은 상황은 일본의 반도체 산업이 세계 시장에서 고전하고 있는 배경과 맞물려 있다. 일본은 1980년대까지만 해도 세계 반도체 시장의 절반을 차지했지만, 그 후 한국과 대만 업체들에 밀리며 현재는 점유율이 7.1%까지 떨어졌다.
특히 AI 반도체 분야에서는 설계부터 제조까지 해외 업체에 밀리며 생성형 AI 시대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기술 격차도 뚜렷하다. 현재 글로벌 최첨단 반도체는 2나노(nm) 공정으로 생산되지만, 일본 내 생산 능력은 12나노 수준에 머물러 있으며, 일본 기업 단독 생산 능력은 40나노까지 후퇴했다.
업계에서는 일본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비(非) AI 반도체 수요가 부진하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국제반도체장비재료협회(SEMI)에 따르면 올해 전 세계 반도체 공장의 평균 가동률은 60~70% 수준으로, 통상 원활한 수준으로 간주되는 80~90%에 크게 못 미치고 있다.
여기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반도체에 대한 관세 부과를 검토하고 있다는 소식까지 더해지며, 일본 반도체 업계의 불확실성은 더욱 커지고 있다. 일본의 대미 반도체 수출 비중은 3%에 불과하지만, 미국 내 최종 제품 가격이 오를 경우 일본 반도체 수요에도 악영향을 줄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일본 내 전문가들은 "정부 보조금으로 공장을 짓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시장 수요와 기술 경쟁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공장만 있는' 산업이 될 수 있다"며, 구조적인 대응이 필요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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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마모토현 기구요마치에 들어선 TSMC 공장 모습 [사진=로이터 뉴스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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