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법 "계약서 쓰기 전 채용내정통지도 계약 성립으로 봐야"
피해자 열 명 중 여덟 명이 소송 포기...비용·기간 부담 커
[서울=뉴스핌] 박진범 기자 = ‘청년백수’ A(29·중랑구)씨는 우여곡절 끝에 지난달 한 출판사로부터 최종합격 통보를 받았다. 당연히 A씨는 부모와 지인의 축하 속에 설레는 첫 출근을 기다렸다.
하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청천벽력 같은 문자 한 통이 날아왔다. “귀하의 합격이 취소됐음을 알립니다.” 눈앞이 캄캄했다.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 치는 듯했다.
다급한 마음에 회사로 전화했다. 담당자는 “원래 그만두기로 했던 사람이 변심해 어쩔 수 없다”는 상식 밖의 말만 되풀이했다. A씨는 분노와 슬픔이 치밀어 올랐지만 별 도리가 없었다.
2년 전 모 언론사에 합격했던 B(30·성북구)씨 역시 일주일 만에 입사 취소를 당했다. 개인사정이 생겨 첫 출근을 늦추려던 게 화근이었다. 사측은 “그럴 거면 다른 회사를 가라”며 매정하게 ‘해고’를 통보했다.

기업이 채용이 확정된 구직자에게 일방적으로 입사취소를 통보하는 ‘갑질’이 여전한 것으로 드러났다. 청년실업률이 사상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는 가운데, 구직자의 의욕을 꺾어버린다는 지적이 나온다.
2013년 취업포털 사람인이 구직자 896명을 대상으로 '합격 결정 후 회사 측의 번복으로 채용이 취소된 경험이 있는가'라고 설문한 결과 전체의 30.5%가 '그렇다'고 응답했다.
더 큰 문제는 채용 취소를 당하고도 약 80% 정도가 '그냥 넘어갔다'는 사실이다. A씨 역시 “이렇다 할 방법이 없어 서둘러 다른 기업에 원서를 냈다”며 “친구들에게 밥도 샀는데 부모님에게 뭐라 말해야할 지 모르겠다”고 난감해했다.
흔히 이런 입사 취소통보는 근로계약서를 쓰기 전이나 실제 근무하기 전에 벌어져 해고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이는 부당해고로 볼 소지가 크다. 이상혁 한국노총법률원 노무사는 “법률상 다툼의 여지가 있지만 부당해고 사례에 해당한다”며 “서면계약서가 없어도 구직자가 공고를 보고 지원한 뒤 면접을 거쳐 채용확정 통보를 받은 것은 구조적으로 계약이 성립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법원도 채용을 내정한 것만으로 사실상 근로계약이 체결됐다고 판결한 바 있다. 서울고등법원은 지난 2000년 경영 악화로 기업이 근로자에게 입사취소를 통보한 건에 대해 “신입사원을 모집하는 것은 근로계약의 청약의 유인, 회사가 요구하는 서류전형 및 면접절차에 구직자가 응하는 것은 근로계약의 청약에 해당한다”며 “지원자에게 최종합격통지를 한 채용내정통지는 근로계약 상 승낙의 의사표시를 한 것으로 봐야 한다”고 판시했다.

전문가는 대기업보다 중소기업들이 이런 만행을 저지른다고 지적한다. 대기업은 사내 노무사가 있거나 전문 법률서비스를 받지만 중소기업은 상대적으로 노동법 지식이 부족한 탓이다.
분쟁이 발생했을 때 근로자 권리를 보호해줄 뚜렷한 규정이 없는 점도 문제다. 근로기준법에는 근로계약서를 언제 써야하는 지 규정이 없다. 특히 중소기업은 입사자가 출근하기 전에 계약서를 쓰는 경우가 드물어 사측이 변심하면 근로자 입장에선 그야말로 속수무책이다.
이상혁 노무사는 “중소기업들의 준법 의식이 낮기 때문”이라며 “중소기업 관계자들 사이에서 '구직자가 소송을 걸면 돈 좀 물어주고 말지'라는 인식이 팽배한 탓”이라고 분석했다.
이어 “관련 민사 소송이 길게는 2년 걸리고, 비용도 발생하기 때문에 구직자 열에 아홉이 문제제기 자체를 포기한다”며 “기업들이 이를 악용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라고 강조했다.
beom@newspim.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