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기사 최신뉴스 GAM
KYD 디데이
문화·연예 문화·연예일반

속보

더보기

[이철환의 예술가 이야기] 반전운동가로 변신한 팝뮤직스타, 존 레논

기사입력 : 2018년01월05일 12:30

최종수정 : 2018년01월05일 12:30

※ 본문 글자 크기 조정

  • 더 작게
  • 작게
  • 보통
  • 크게
  • 더 크게

※ 번역할 언어 선택

예술에 살고 사랑에 살고(49)

Imagine there's no heaven/ It's easy if you try
No hell below us/ Above us only sky
Imagine all the people living for today...

Imagine there's no countries / It isn't hard to do
Nothing to kill or die for/ And no religion too
Imagine all the people living life in peace...

You may say I'm a dreamer/ But I'm not the only one
I hope someday you'll join us/ And the world will be as one

Imagine no possessions/ I wonder if you can
No need for greed or hunger/ A brotherhood of man
Imagine all the people sharing all the world...
- Imagine/ John Lennon-

상상해보세요 천국이 없는 세상을/ 당신이 노력한다면 그건 쉬운 일입니다,
그러면 지옥도 없을 것이고/ 우리 위에는 오직 하늘만 있을 뿐
상상해보세요 모든 사람들이 오늘을 위해 사는 것을

상상해보세요 국경이 없는 세상을/ 그건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누굴 죽이거나 죽을 이유도 없겠지요./ 종교도 없어지겠지요.
상상해보세요 모든 사람이 평화스럽게 사는 것을

그대는 나를 몽상가라 부를지 모르지만/ 그러나 나뿐만이 아닙니다.
언젠가 당신도 우리와 함께 하길 바랍니다/ 그러면 세상은 하나가 될 것입니다.

상상해보세요 소유가 없는 세상을/ 당신이 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소유가 없다면 탐욕도 굶주림도 없고/ 사람은 모두 한 형제가 될 텐데.
상상해보세요 모든 사람이 이 세상을 함께 공유하는 것을

존 레논이 만든 노래 《Imagine》은 캄보디아 공산당 정권인 크메르루주의 인민학살 행위를 고발한 영화 《킬링필드》의 마지막 장면 배경음악으로 나온다. 영화 내용도 관객의 마음을 뭉클하게 만들었지만, 배경음악은 이를 한층 더 고조시켰다.
존 레논(John Lennon, 1940~ 1980)은 영국의 가수다. 1960년대 전 세계를 풍미했던 전설적인 팝뮤직 그룹인 비틀즈(The Beatles)의 창립 멤버이기도 하다. 폴 매카트니와 함께 사실상 비틀즈를 이끌었던 존 레논은 영국 싱글 차트에서 폴 매카트니에 이어 두 번째로 가장 성공적인 작곡가로 기록되어 있다.
존 레논이 작곡에 참여한 곡으로는 《I Want To Hold Your Hand》, 《She Loves You》, 《Please Please Me》, 《All You Need Is Love》, 《Across the Universe》, 《Come Together》, 《Love》, 《Imagine》 등이 있다.

약 10년 동안 전 세계인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아왔던 그룹 비틀즈는 1970년으로 접어들면서 갑자기 해체하기에 이른다. 가장 큰 원인은 핵심멤버이던 폴 매카트니와 존 레논 두 라이벌 간의 불화였다. 이들의 불화는 공공연한 것으로 당사자뿐만 아니라 팬이나 매스컴도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그러나 레논은 뮤지션으로서의 폴 매카트니의 실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그래서 레논은 “폴에 대해 욕을 해도 좋은 사람은 나뿐이다. 다른 사람이 욕하는 것은 허락하지 않는다.”라는 발언을 남기기도 했다. 또 암살당한 날인 1980년 12월 8일의 인터뷰에서 “나는 인생에서 두 번의 훌륭한 선택을 했다. 폴과 요코가 그 선택이다. 매우 좋은 선택이었다.”라고 말했다.

레논이 운명의 여인인 오노 요코와 만나게 된 것도 또 다른 해체요인으로 꼽힌다. 존 레논과 행위예술가 겸 설치 미술가인 일본인 여성 오노 요코와의 만남은 팝의 전설을 바꿀 만큼 운명적이었다. 1966년 런던의 한 갤러리에서 처음 만나 사랑에 빠졌을 당시, 두 사람은 모두 자녀와 배우자가 있던 상태였다. 그러나 그들의 운명적인 사랑은 누구도 멈추게 할 수 없었기에 각자의 배우자와 정리를 한 후, 1969년 결혼을 하게 된다.

베트남 전쟁으로 반전운동이 거세던 시기에 결혼한 레논과 요코 커플은, 결혼을 기념한 별난 퍼포먼스를 진행하게 된다. 다름 아닌 ‘침대 시위(Bed-In For Peace)’이다. 이는 1969년 5월, 그들의 신혼여행지인 캐나다 몬트리올의 한 호텔로 기자들을 초대해 3일간 침대 위에서 기자들과 인터뷰하며 반전과 평화 메시지를 전하는 형식의 퍼포먼스였다. 그 이후에도 존 레논은 오노 요코를 멘토(mentor)라 부르며 그녀와 함께 반전운동 관련 퍼포먼스와 이벤트를 벌린다.

존 레논과 부인 오노 요코의 다정한 모습 <사진=이철환>

레논의 두번째 아내인 오노 요코는 행위예술인 '조각내기(Cut Piece)'로 유명해진 행위예술가이다. 1964년 동경에서 첫 공연된 이 작품은 당시로서는 충격적이라 할 수 있는 행위예술이었다. 요코가 무대의 중앙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고, 관객들이 한 명씩 무대에 올라 가위로 알몸이 될 때까지 옷 조각을 하나하나 잘라내는 것이 주 내용이다. 요코는 이 작품을 통해 사회적 연대와 사랑을 주요 주제로 하여 성(性)과 성차별, 그리고 인간의 고뇌와 고독으로 인한 거대한 우주적인 고통을 다루고 있다.

레논과 그녀를 처음 이어줬다고 알려진 작품도 유명하다. 레논이 처음으로 요코의 전시회에 왔는데 천정에 하늘이 그려져 있고 사다리가 놓여있었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천장을 자세히 본 존 레논은 거기서 ‘yes’라는 작은 글씨를 발견하였고, 그 긍정적인 메시지에 커다란 감동을 느꼈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는 백인 주류사회에서 성공하기 위해 유명한 팝스타 존 레넌의 명성을 이용한다는 비난과 함께, 비틀즈를 분열시키고 해체시킨 악랄한 동양의 마녀라는 비방에 시달려야 했다. 이런 비난과 루머는 이들이 결혼할 즈음 비틀즈 내부의 불화가 시작된 데다 또 당시의 반 아시아, 반 페미니즘 성향도 한 몫을 하였다.

존 레논은 음악과 영화, 책, 회견과 인터뷰 등을 통해 반전과 사회저항 운동을 펼치는 가운데 적지 않은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그는 비틀즈의 다른 멤버들과 함께 1965년 대영제국 훈장 5등급(MBE, Master of The British Empire)을 받았다. 이는 당시 대중음악가로서는 이례적인 서훈이었다. 그러나 레논은 영국의 베트남전 참전에 대한 비판의 의미로 몇 년 후 이 훈장을 반납한다.

레논은 1969년 TV 방송에 나와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에게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띄운다. “여왕 폐하, 영국이 나이지리아-비아프라 내전에 개입한 것을 반대하고, 미국이 벌인 베트남 전쟁에 대한 영국의 지지 표명에도 반대합니다. 그리고 또 저의 'Cold Turkey' 차트 순위가 내려간 것에도 반대하는 뜻으로 이 훈장을 돌려 드립니다.”

그는 또 다른 한 인터뷰에서 기독교까지 비판하다가 커다란 곤욕을 치르게 된다. “기독교는 결국 쇠퇴해 소멸하고 말 것이다. 내 말이 옳다는 것이 언젠가는 증명될 것이다. 비틀즈는 예수 그리스도보다 유명하다. 로큰롤과 기독교 중 어느 쪽이 먼저 사라질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리스도는 현명했지만 제자들은 우둔했다. 그들 때문에 기독교가 소멸되어간다면, 우리 쪽이 더 유리하지 않을까?”
이 발언이 나온 이후 기독교계뿐만 아니라 자신의 팬들로부터도 거센 비판에 직면하게 된다. 곳곳에서 비틀즈를 규탄하는 집회가 열렸고, 비틀즈의 음반을 모아 불태우는 일까지 벌어졌다. 사태가 이처럼 걷잡을 수없이 악화되자 그는 말실수를 했다고 인정하면서 사죄를 하게 된다. 그러나 로마교황청은 레논이 죽은 지 28년이 지난 2008년 11월에야 그의 발언을 용서한다는 성명을 발표하게 된다.

존 레논은 베트남 전쟁이 종결된 1975년부터는 음악활동과 사회활동을 중단하고 거의 집에 틀어박혀 은둔생활을 하게 된다. 이때 이미 그는 우울증 증세를 보이고 환각성마약에도 손을 대면서 심신이 많이 망가지고 있었다. 이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일본 마녀가 그를 미치게 만들어 집안에 감금시켰다”고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그러다 1980년으로 접어들면서 그는 뉴욕에 스튜디오를 마련하고 재기를 꿈꾸며 음반제작에 몰두하기 시작하였다. 그 해 12월 8일, 스튜디오 작업을 끝낸 레논과 요코가 탄 리무진이 그들의 아파트 앞에 도착했다. 그들이 차에서 내리는 순간, 갑자기 한 남자가 나타나더니 존 레논의 이름을 외치며 권총을 발사하였다. 총알 4발이 가슴과 팔에 명중하였다. 결국 레논은 목숨을 잃었는데 그의 나이 40세였다. 경찰당국은 범인이 마크 채프먼이라는 정신병증세를 지닌 청년이라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FBI가 반전운동과 사회저항 운동을 펴는 그를 제거하기 위해 일을 꾸몄다는 음모론이 제기되기도 했다.

레논의 죽음이 알려지자 전 세계적으로 애도의 물결이 상당히 오랜 기간 지속되었다. 그만큼 그는 이 시대에 커다란 영향력을 미친 대 스타이자 대중들의 우상이었다.

이철환 객원 편집위원 mofelee@hanmail.net (전 재정경제부 금융정보분석원장, 전 한국거래소 시장감시위원장. 문화와 경제의 행복한 만남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뉴스핌 베스트 기사]

사진
[변상문의 화랑담배] 제2회 광복군 변상문의 '화랑담배'는 6·25전쟁 이야기이다. 6·25전쟁 때 희생된 모든 분에게 감사드리고, 그 위대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제목을 '화랑담배'로 정했다.  1940년 9월 17일 중국 중경 가릉호텔에서 성대한 행사가 열렸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광복군 창설식이었다. 미국 한인 동포들이 보내온 돈 4만원으로 조직한 군대였다.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20억 원 정도 된다. 총사령관 이청천 장군, 참모장 이범석 장군, 제1지대장 이준식, 제2지대장 고운기, 제3지대장 김학규, 제5지대장에 나월환을 임명했다. 지대장은 지금의 사단장에 해당한다. 모두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를 비롯하여 남북 만주에서 전개된 항일무장투쟁에 직접 참여하여 활동한 독립군 출신이었다. 한국광복군 훈련반 제1기 졸업사진. [사진= 독립기념관] 임시정부 주석 김구는 포고문을 통해 "국내외 동포들에게 알립니다. 1940년 9월 17일부로 대한민국 광복군을 창설하였습니다. 광복군은 1907년 8월 1일 일제가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한 날이 바로 광복군 창설일임을 선언합니다. 광복군은 구 한국군의 후신으로 33년간에 걸친 의병과 독립군의 항일무장투쟁을 계승한 전통 무장 조직입니다"라고 했다. 대한제국 국군-의병-독립군의 군맥(軍脈)과 군혼(軍魂)을 분명하게 잇고 있음을 천명한 것이다. 부대 편성은 소대, 중대, 대대, 연대, 여단, 사단 6단으로 편성하였다. 총 3개 사단을 조직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인원이 적은 상황에서 우선 지대를 만들고, 각 지대를 구대와 분대로 연계한 전투부대를 구성했다. 임시정부에서 1940년 9월 19일 중국 국민당 정부에 통보한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직원 명단'에 의하면, 부대 규모가 총사령부와 4개 단위부대, 여기에다 조선혁명군 부대까지 포함하여 5000여 명이었다. 임시정부에서는 1941년 12월 연합국의 일원으로 일본에 선전포고했다. 1942년에는 미국 측에 "미국이 제주도를 해방 시켜 주면, 중경에 있는 임시정부를 제주도로 옮긴 후, 광복군이 미군과 함께 한반도 상륙작전을 전개하겠다."라고 제안하였다. 이 제안은 실제로 미국 OSS 부대(지금의 CIA)와 1945년 4월부터 8월까지 강도 높은 국내 진공 작전을 준비했다. 주요 훈련은 3개월 기간에 고공낙하, 암살법(권총에 특수장치를 하여 소리 없이 암살하는 방법), 통신(암호의 작성 및 해독법, 무전기 조작 및 수리), 교란 행동, 정보수집, 폭파 등 이었다. 일과는 07:00∼12:00 오전 훈련, 13:00∼18:00 오후 훈련, 19:00∼22:00 야간 훈련이었다. 주요 임무는 대한민국으로 낙하산과 잠수함으로 침투하여 미 공군 공습에 필요한 지형 등의 정보를 제공하고 일본군 군사시설 탐지 및 파괴 지하 유격대를 조직하여 연합군 상륙작전 시 제2선에서 연결하는 작전이었다. 마침내 1945년 8월 7일 모든 훈련을 마치고 국내진공작전 출정식을 개최했다. 개시일은 8월 10일이었다. 출정식 때 장준하 경기도 공작 반장은 "나는 조국광복을 위해 죽음을 선택했습니다. 내가 나의 죽음을 지불하면, 내 능력껏 그 대가가 조국을 위해서 결제될 것입니다. 나의 각오는 한 장의 정수표입니다. 발생인은 장준하, 결제인은 조국입니다"라는 유서까지 작성했다. / 변상문 국방국악문화진흥회 이사장 2025-09-08 08:00
사진
'포스트 이시바' 누구?...고이즈미·다카이치 선두 [서울=뉴스핌] 오영상 기자 =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가 자민당 총재직 사임을 공식화하면서, 일본 정국의 관심은 차기 자민당 총재 선거로 쏠리고 있다. 집권당 총재가 곧 총리직을 맡는 일본 정치 구조상 이번 총재 선거는 사실상 다음 총리를 뽑는 절차다. 자민당은 조만간 새로운 총재 선거 일정을 확정할 예정이다. 이번 선거에서는 지난 2024년 9월 총재 선거에서 이시바 총리와 경합했던 주요 인사들이 다시 출마할 가능성이 높다. 고이즈미 신지로 농림수산상, 다카이치 사나에 전 경제안보담당상, 하야시 요시마사 관방장관, 모테기 도시미쓰 전 간사장, 고바야시 다카유키 전 경제안보담당상 등이 후보군으로 거론된다. 정국 운영이 소수 여당이라는 제약 속에서 이루어지는 만큼, 차기 총재가 야당과 어떻게 연대할지, 어떤 연립 구도를 짤지가 최대 쟁점으로 꼽힌다. '포스트 이시바' 후보로 꼽히고 있는 고이즈미 신지로 일본 농림수산상 [사진=로이터 뉴스핌] ◆ 고이즈미·다카이치 선두권 현재 여론조사에서는 고이즈미 농림수산상과 다카이치 전 경제안보상이 선두권을 형성하고 있다. 니혼게이자이신문 지난달 29~31일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차기 총리에 적합한 인물로 다카이치가 23%, 고이즈미가 22%를 기록했다. 나란히 1, 2위다. 자민당 지지층으로 한정하면 고이즈미가 32%로, 다카이치(17%)를 크게 앞서는 것으로 나타났다. 다카이치는 2024년 총재 선거에서 1차 투표에서 1위를 차지했으나 결선에서 이시바에게 역전패했다. 고이즈미 역시 의원 표에서 선두에 올랐지만 당원 표에서 밀리며 결선에 오르지 못했다. 두 사람 모두 당내 기반과 대중적 인지도를 겸비해 차기 선거에서도 가장 주목받는 주자들이다. 고이즈미 농림수산상은 1981년생(44세)으로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의 차남이다. 2009년 중의원 첫 당선 이후 줄곧 '포스트 아베', '차세대 리더'로 주목받았다. 환경상, 농림수산상을 거쳤으며 개혁 성향과 젊은 이미지로 지지층을 넓혔다. 2024년 총선에서 당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았으나 참패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이후 농림수산상으로 복귀해 쌀 유통 개혁 등 농정 개혁에 매진했다. 대중적 인지도와 '고이즈미 브랜드'라는 정치 자산이 최대 강점으로 꼽힌다. 다카이치 전 경제안보상은 1961년생(64세)으로 보수 강경파로 분류되는 여성 정치인이다. 2021년 총재 선거에 첫 도전해 아베 신조 전 총리의 전폭적 지원을 받으며 3위를 기록했다. 2024년 총재 선거 1차 투표에서 최다 득표(의원 72표, 당원 109표)를 얻었으나 결선에서 이시바 총리에게 역전 당했다. 유일한 여성 후보로서 '보수의 아이콘' 이미지를 갖고 있으며, 아베 전 총리와 가까웠던 의원 그룹이 주된 지지 기반이다. 이시바 정권에서 당직 제안을 거절하며 독자 노선을 유지해 왔다. '포스트 이시바' 후보로 꼽히는 다카이치 사나에 전 일본 경제안보담당상 [사진=로이터 뉴스핌] ◆ 하야시·모테기 등 잠룡도 주목 고이즈미와 다카이치 두 선두 주자 외에 잠룡들의 행보도 주목된다. 하야시 요시마사 관방장관은 옛 기시다파 일부의 지지를 받고 있으며, 이시바 정권의 2인자로서 존재감을 키워왔다. 모테기 도시미쓰 전 간사장은 당내 경험과 풍부한 인맥을 강점으로 삼고, 아소 다로 전 부총리와 교류를 통해 지지 기반을 다지고 있다. 고바야시 다카유키 전 경제안보담당상은 5선 의원으로, 동기 의원들과 옛 니카이파의 지원을 받으며 출마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 총재 선거 이후에도 정국 '안갯속' 자민당 총재 선거는 국회의원 표와 당원·당우 표를 합산하는 방식이 원칙이지만, 긴급 시에는 국회의원과 지방 지부 대표만 투표하는 '양원 의원 총회' 방식으로 대체될 수 있다. 이 경우 의원 표의 비중이 커져 파벌 역학이 중요해진다. 차기 총재가 선출되더라도 곧바로 정권 안정으로 이어진다는 보장은 없다. 일본 헌법상 총리는 국회에서 지명되는데, 자민·공명 양당은 현재 중의원과 참의원 모두에서 과반을 잃은 상태다. 따라서 야당이 단일 후보를 세워 결집할 경우, 자민당 총재가 총리로 지명되지 못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자민당 총재가 총리에 오르더라도, 예산안·세제 개혁 법안 등 국정 운영은 야당 협조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런 이유로 차기 총재는 곧바로 '연립 확대'나 '정책 연대'를 추진할 수밖에 없고, 총재 선거 과정에서도 어떤 야당과 손을 잡을지가 핵심 화두가 된다. 결국 이번 자민당 총재 선거는 단순히 차기 지도자를 뽑는 절차를 넘어, 일본 정치가 다당제 속에서 어떤 연립 구도를 구축할지 시험대가 되는 분기점으로 평가된다. goldendog@newspim.com 2025-09-08 09:26
기사 번역
결과물 출력을 준비하고 있어요.
기사제목
기사가 번역된 내용입니다.
종목 추적기

S&P 500 기업 중 기사 내용이 영향을 줄 종목 추적

결과물 출력을 준비하고 있어요.

긍정 영향 종목

  • Lockheed Martin Corp. Industrials
    우크라이나 안보 지원 강화 기대감으로 방산 수요 증가 직접적. 미·러 긴장 완화 불확실성 속에서도 방위산업 매출 안정성 강화 예상됨.

부정 영향 종목

  • Caterpillar Inc. Industrials
    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 시 건설 및 중장비 수요 불확실성 직접적. 글로벌 인프라 투자 지연으로 매출 성장 둔화 가능성 있음.
이 내용에 포함된 데이터와 의견은 뉴스핌 AI가 분석한 결과입니다. 정보 제공 목적으로만 작성되었으며, 특정 종목 매매를 권유하지 않습니다. 투자 판단 및 결과에 대한 책임은 투자자 본인에게 있습니다. 주식 투자는 원금 손실 가능성이 있으므로, 투자 전 충분한 조사와 전문가 상담을 권장합니다.
안다쇼핑
Top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