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주 대두병 하나를 앞에 갖다 놓았다. 반 정도를 단숨에 마셨다. 아이들을 불러 앞에 앉혀 놓았다.
“주혜야, 경혜야, 아빠가 너희들 사랑하는 거 알지?”
유언조의 말을 했다. 그리고 욕실에 들어가, 안에서 문을 잠갔다. 거울을 빤히 들여다보다가, 세면대에 놓인 샴푸를 들어 욕조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비누, 크림, 로숀, 화장품, 치약, 린스, 면도기.......손에 잡히는대로 욕조건, 벽이건 마구 내던졌다. 주먹으로 욕실 문을 갈겨 음푹 들어가게 했고, 변기 커버를 발로 내리쳐 박살냈다.
미친 듯 고함을 질렀다. 눈물이 섞여 나왔다. 아이들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빨래 비누를 벽면에 던져 으깨지게 했다. 세면대에 층층이 쌓인 세면도구들을 집어, 좁은 욕실 안에 마구잡이로 던졌다. 샴푸 용기들이 깨져나가 푸르고 붉은 액체들이 욕조 안, 바닥, 벽, 천정에 질질 흘렀다. 거울에도 줄줄 흘렀다. 붉은 액체에 노란, 분홍 액체들이 뒤섞여 광란의 황홀경을 만들고 있었다.
아이들은 욕실 문을 흔들고, 욕실의 불도 껐다 켰다 했다. 아빠, 나오라고 엉엉 울었다. 뒤범벅된 액체들 틈에, 깨진 샴푸 용기, 화장품 뚜껑, 크림 뚜껑 파편들이 어지럽게 흩뿌려져 있었다. 바닥 전체에 용액이 넘치고 날카로운 파편들이 줄줄이 널렸다.
그 위를 맨발로 밟고 다녔다.....마구 부수었다. 아직도 부서져야 할 것이 내 안에 많은 모양이었다. 벽거울을 주먹으로 갈겼다. 벽에 찰싹 밀착되어 있어서 깨지지 않았다. 또 갈겼다. 깨지지 않았다.
고교시절 울컥울컥 솟는 분노와 울분을 달래느라 얼마나 교동집의 마루 기둥을 맨주먹으로 쳐댔던가. 그때 다 빠져나오지 못한 눈물이 목젖을 타고 흘렀다. 매일 밤 어머니의 가슴앓이 바가지와, 잠 못 이루며 묵묵히 견디던 아버지. 불안한 허공. 탄력 잃은 집안 공기. 언제부터. 왜. 도대체 무엇 때문에. 있는 힘을 다해 최대한 열심히, 치열하게, 빗나가지 않으려 몸부림치며 살아왔지만 어느 순간 뒤돌아본 내 처지가 너무도 못나고 서글퍼, 삶에도 속고 시에도 속아 살아온 내 존재 전체의 허구가 바보스러워, 거울을 또 갈겼다. 깨지지 않았다. 또 또 갈겼다. 퍽, 깨지며, 유리 파편이 튀었다. 주먹에 피가 줄줄 흘렀다.
휴지로 대충 감고는 욕실의 문을 열었다. 그대로 현관으로 내달렸다. 아이들은 더 크게 울어대며 달려왔고 아내도 얘기 좀 하자고 소매를 붙잡았다.
“더 이상 할 얘기 없어. 끝내!”
버럭 소리를 지르고는 연 아파트 문을 꽝 닫고 나섰다.
택시를 집어타고 영등포로 내달렸다. 뭔가 무너진 냄새가 있는듯한 그곳이 내 무의식을 잡아당겼는지도 모르겠다. 아무런 볼 일도, 사연도 추억도 없는 그곳에 내려 무턱대고 걸었다.
아무 술집에나 들어가 퍼마시다가 싫증이 나면 그 순간 나와버렸다. 삐뚤빼뚤 걷다가 눈에 띄는 아무 술집에나 또 들어가 메뉴판에서 아무거나 찍어 시켜 먹었다. 몇 잔 마시다가 마음에 불바람이 불면 다짜고짜 나왔다. 만취한채 돌아다녔다. 밤공기가 찼다. 영영 가출해버릴 생각이었다.
영등포 시장, 지하도, 으슥한 골목...나같은 놈들은 얼마든지 있었다. 발 딛는 곳마다 나처럼 잘못 산 놈들 투성이었다.
랭보가 스쳐갔다.
저주 받은 시인. 온몸의 벼락을 맞은 사나이. 피뢰침처럼 자기 몸 속으로 세상의 고통과 격렬, 알 수 없는 힘을 통과시킨 희귀한 인간. 당대까지의 모든 질곡, 역사, 착란을 압축적으로 마셔버리고 그럼으로써 한 시대의 능선을 뛰어넘고자 했던 기이한 시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