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무반응은 그 감김을 더욱 재촉하였다. 난 아무 생각 없이, 그녀를 짝사랑하였다. 그것은 사건이었다. 덫이 걸려든 산짐승을 산산조각 내듯이, 내 첫사랑은 덫이었다.
난 왜 그렇게 함몰적인 사랑을 했을까. 페퍼포그 뿜어대는 경찰차를 향해 짱돌을 던져도 풀어지지 않는 속. 그녀를 사랑한다는 것이, 막 빨아놓은 하얀 내의 같은 그녀 마음을 더럽힐지 모른다는 끝없는 자책. 사춘기 내내 어두운 방에 누워있던 어머니. 언제나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듯한 아버지의 깊은 침묵. 사업 실패로 인한 썰렁한 집안 공기....그리고 그 이전, 몰락한 장한 가족사와 이상주의자로서의 아름다운 실패.....
나는 성난 코뿔소의 뿔처럼 성장하고 있었고, 가파른 들판을 달리다가, 너무도 순진하고 깨끗한 토끼를 만난 것이다. 아무리 배가 고프고 허기져도, 동물의 비양심 속에서도 차마 먹을 수 없는 저 떨고 있는 아름다움 앞에, 쓰린 배를 움켜쥐고 하염없이 서 있었던 것이다. 하얀 토끼는 도망갈지도, 달려들지도 못하고, 애교도, 기교도, 꾀도 없이, 그저 선한 눈으로 나를 바라볼뿐. 그 순간 어찌 함몰되지 않으리. 나의 대학 생활은 그렇게 시작되었고, 졸업은 실연과 대학원 낙방으로 끝맺었고, 대학 4년간 감정의 수묵화 속에, 시들고 시커멓게 타들어가고, 몇십 편의 시를 쓰고, 탈진하고, 신경쇠약으로 점철된 나날이었다.
여름
너를 사랑했다. 플라타너스 잎들이
파라솔처럼 아름다웠다
하늘은 바람의 현을 고르고 있었고,
유원지의 콜라병은 젖어 있었다
컵을 조금 기울이며, 너는 시린 흉내를
내곤 했다. 여름은 하나, 둘 날리는
너의 머리칼에 먼저 왔다
우리는 가끔 소리내어 웃었다
(1979. 여름)
그리고 몇년 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