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이미지는 생생해. 햇살이 강해, 다소 약한 네 얼굴이 좀더 유약해 보였고, 그 여린 얼굴에 산뜻하게 걸쳐진 유리알에 투영된 연보라색 아이섀도! 그때부터, 너에 대한 내 기다림은 시작되었어. 왜 갑자기, 네가 청순한 사슴의 이미지로 내 가슴 속 인화지에 강렬하게 인화되었을까....나도, 기다림의 미학은 알만큼 아는 사람인데. 나는 너의 기다림의 자세에 반한 사람이다.
1987년 봄, 명동의 어느 까페에서, 너는 내가 마시는 커피의 받침잔을 두 손으로 곱게 받쳐 들고, 화사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언제까지라도 그럴 것처럼. 또 그해 여름, 이한열에 대한 추모 데모로 명동과 을지로 일대가 최루탄 가스로 뒤덮힐 때, 너는 가스 자욱한 사무실에 혼자 남아 마스크를 쓴채 콜록거리며 내 대학원 논문을 끝까지 정성껏 타이핑 해 주었다.
결혼초 지독히도 추운 어느 겨울밤, 내가 동료들과 술을 퍼마시다가 새벽 두시도 넘게 귀가했을 때, 너는 아파트단지 내 미끄럼틀 위에서 오돌오돌 떨며 기다리며 서 있었다. 왜 늦었냐는 한마디 질책도 없이. 우리 사이의 그 순정한 기다림들이 왜 서서히 탈색되어 갔는지.....
미안하다. 아직도 늦지 않았다고 말해줘. 너는 충분히 그런 말 해주는 사람이잖아. 난 네가 사랑한 사람이고, 늘 너를 사랑한 사람이야. 달라진 내가 아니야. 내가 본의 아니게, 너를 실험했구나. 순정의 네 가슴을 대패로 팍팍 밀었구나. 그랬구나. 내가. 사랑도 사랑의 이름으로 사랑의 오명을 남기며, 생활 속에 들어가 변할 수 있는 거구나.
내가 그렇게 너에게 못되게 변해 가면서도 깨닫지 못한 것은, 나를 대하는 너의 태도가 거울처럼 여전했기 때문이다. 너는 늘 한결같았다. 그 거울에 비친 나자신도 한결같으리란 착각 속에 점점 괴물로 변해가는 나에게, 너는 변함없는 미소로 보듬어줬다. 그대 미소의 명암과 채도가 서서히 변해가는 것을, 난 왜 몰랐단 말이냐.
그대의 미소, 그 청순한 표정 아래에, 내 독단에 대한 앙금의 근육이 꿈틀거리기 시작한 사실을, 난 왜 눈치채지 못했을까. 그대의 연출은 천재적이다. 이 못난 여자야. 넌 왜 끝까지 연출을 했니? 속 시원하게, 내가 알아차릴 때까지 바가지를 긁던지, 그래도 내가 눈치 못채면, 뭔가 방법이 있었을 것 아냐. 십년이나 지났어. 증권 객장 아사리판에서 먹고사느라 발버둥치다보니, 너에 대한 따스함마저, 그 몇 푼 되는 에너지라고, 잃어버리고 말았나봐.
그래도 그렇지, 이 사람아. 이렇게 뒤늦게 갑자기 죽음 같은 적막 속에서, 숨 끊어질듯 말없이 절규하면서 나를 괴롭혀야겠니? 혁에게 전화할 때, 뭔가 얘기를 했어야지. 그 놈이 한 달 전쯤 내게 전화해서, “진석아, 너 무슨 일 있니, 무슨 일 있어? 와이프하고?” 했을때, “왜? 아니. 뭐라는데? 그런 거 없어” “그래, 알았어”......왜 그 정도의 SOS에 너와 나의 운명을 테스트했니? 나는 사업 얘긴줄 알았잖아. 최근 당신의 변화도 그래. 매일 밤 늦게 들어오고, 방문을 걸어잠근 채 혼자 술을 마시고 밤새 전화통을 붙잡고 있고....난 당신 친구 숙이 이혼 위기에 처해 그 문제로 당신이 같이 괴로워하며 그러는 줄로만 알았잖아.
최근에 밖으로만 나다니는 너에게 고함을 질렀던 것이 가슴이 아파. 나도 사실은 힘들었어. 네가 꿈에서 봤다는, 늪에 빠져있는 바로 그 모습이야. 진급에서 세 차례나 탈락되어 사표를 던질까말까 고질적 헷갈림이 올해만 해도 몇 만 번은 내 머릿속에 굴러다녔을거야. 친분했던 시선들에 의해 기가 꺾여, 알게 모르게 매장되어 가는 듯한 우울과 침몰의 시간이 참 길었어.
회사에 남아 버티자니 치욕과 불안만 더해가고, 사표를 던지고 네트워크 마케팅을 전업으로 삼기엔 위험해 보이고, 나라 경제가 이 꼴이니 다른 대안도 만만치 않고, 마이너스 대출로 받은 삼천만 원도 금세 바닥이 날 테고, 너는 너대로 힘들게 돌아다니고.....당신 SOS는 너무 약했어. 나는 너무 둔했고. 내겐 너의 이탈이 갑작스러웠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