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트워크 마케팅에 뛰어든 작년 가을부터 집 분위기가 조금씩 변했다. 핸드폰의 구입, 아내의 빈번한 외출, 수시로 걸려오는 전화들. 결혼과 동시에 다니던 회사를 접고 집에 틀어박혀 살림만 하던 아내에게 네트워크 마케팅은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었다.
세미나에 참석하라는 스폰서, 제품을 주문하는 소비자, 리쿠르팅을 하러 같이 가달라는 다운들.....내가 모르는 사람들이 여기저기에서 아내의 가슴 속에 드나들기 시작했다. 네트워크가 커짐에 따라 아내는 점점 외출이 잦아졌고 바빠졌다.
카드 긁는 것도 예사로워졌으며 밤늦도록 술자리를 하는 일도 생겨났다. 나도 같이 뛰는 입장이라 이 모든 변화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밖의 일이 눈덩이처럼 커지면서 파출부까지 부르게 되었다. 아이들은 엄마의 품에서 많이 떨어져 유년기를 보내야 했다.
아내는 바쁘게, 신나게 밖으로 돌아다녔다. 저 터질듯한 정열을 누른채, 좁은 집구석에서 십년 세월을 숨죽인 것이다. 발랄하고 적극적인 성격의 아내는 높새바람 만난 연처럼 자유롭게 부유해 다녔다. 오래 가두어 물이 찰대로 찬 댐이 수문을 열자마자 억눌린 하반신을 풀며 콸콸 쏟아져 내리듯.
사실, 아내를 바깥으로 내몬 건 내 탓이기도 하다. 어려서부터 몽상을 좋아해 불문학을 전공했는데 어쩌다 보니 증권으로 풀렸다. 아사리판 같은 주식시장에서 악착같이 버티면서도 시인의 꿈을 집요하게 불태우고 있었는데, 이질적인 두 세계 속에서의 몸부림으로 심신이 늘 고달팠다.
네트워크 마케팅에 뛰어든 것도 그런 와중에서였다. 혼란스런 증권일에서 벗어나 가족 부양과 함께 자유롭게 글을 쓰려면 최소한의 경제 활동은 필수였고, 노력하면 시간적 자유와 경제적 해방을 동시에 맛볼 수 있다는 네트워크 마케팅이 참신한 돌파구로 다가왔었다.
보다 결정적 동기로는, 진급에서의 연속 좌절이었지만. 차장, 부장도 아닌 과장 진급에 내리 삼년씩이나 물을 먹은 것이다. 그래도 주요 부서인 국제금융팀 소속이라 두 번째까진 알량한 자존심 하나로 견뎠는데 세번째 미끄러지자 도저히 그대로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런 판국에 IMF의 격랑은 증권회사라는 부서지기 쉬운 배와 그 안의 갑판 같은 삶의 터전을 심하게 흔들어댔고, 나는 갑판 위에서 이리저리 쏠리며 동료들 눈치 보기도 민망한 구석으로 쥐새끼처럼 밀려버린 것이다.
새벽 세 시가 다가와도 아내는 돌아오지 않았다. 아내의 핸드폰 번호를 눌렀다. 곧 돌아온다 하면서도 오지 않았다. 질투와 분노의 불길이 다시 쓰린 위에서 올라와 나를 괴롭혔다.

아이들 이불을 여며주고 밖으로 나섰다. 새벽 세 시의 아파트 단지는 은은하고 평화로왔다. 봄이면 벚꽃 흐드러지게 피는 꽃밭 옆에서 두 연인이 깊게 잠겨 있었다. 객관적으로 바라보면 그지없이 아름다울 풍경인데, 지랄같은 나의 주관이 그 풍경 모서리에 치여 아프게 신음하고 있었다.
내가 그쪽으로 걸어가자 최영호는 아파트 아래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아내도 그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10월의 스산한 밤하늘의 달은 지면에 세 개의 동영상 그림자를 그리고 있었다.
최영호의 걸음과 비슷한 속도로 그를 따라 걷는 아내의 발길은 무슨 의미일까.
“이리 와.” 아내에게 소리쳤다. 적막한 아파트단지 내에 크게 공명되어 울렸다. 아내는 멈추지 않고 그를 향해 계속 걸어갔다. “이리 안와!” 고함을 지르는 동시에 감정이 억제되지 않아 곁에 있는 트럭 견인용 쓰레기함 안으로 내 몸을 날렸다. 엊저녁 그 여자의 전화를 받은 후로 내 몸은 충격에 휩싸여 조그만 자극에도 지나치게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지겨워, 정말 지겨워”
아내는 더 빨리 그를 향해 걸어갔다. 쓰레기함 밖으로 뛰쳐나온 나는 곁에 무더기로 쌓인 쓰레기 자루들을 하나, 둘, 미친듯이 내던지기 시작했다. 열, 스물, 서른....사람 크기만한 쓰레기자루가 수십 개 경사진 아파트 차도 아래로 구르며 난장판이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