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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의 모스크바 이야기]...(4-1) 일거수일투족이 역사였던 고르바초프

기사입력 : 2019년01월17일 17:46

최종수정 : 2019년01월17일 17:46

20세기 역사흐름 바꿔...위대한 지도자 vs 배신자·매국노
'도전받지 않는 지도자' → 강경보수파 쿠테타로 급전직하
4개월만에 당서기장 사임-공산당 해산-대통령 사임-소련해체
‘미완의 개혁’...냉전종식-소련·동유럽 개인자유 확대 등 평가

[김흥식 뉴스핌 객원논설위원]

소련 공산당의 마지막 서기장이며 최초 대통령이자 마지막 대통령이기도 한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20세기 역사의 흐름을 바꾸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게 일반적 평가다. 신사고에 입각해 개혁. 개방을 강력 추진한 그에 대한 평판은 그러나 관점에 따라 극명하게 엇갈린다.

◆20세기 역사흐름 바꾼 고르바초프...위대한 지도자 vs 배신자·매국노

한편에서는 2차 대전 이래 지속되어온 냉전체제를 종식시키고 독일통일과 동유럽 공산국가들의 민주화에 결정적 기여를 한 위대한 인물로 찬사를 받는다. 또한 소련 전역에 촘촘하게 드리워졌던 거미줄을 거둬낸 인물로 평가받는다.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대통령 [사진=뉴스핌DB]

또다른 쪽에서는 사회주의 종주국인 소련이 해체에 이르는 과정에서 중대한 원인을 제공한 장본인이며 특히 동구권을 대가없이 고스란히 서방에 넘겨준 점에서 혹독한 비판을 받고 있다. 러시아 내부에서는 ‘배신자’ ‘매국노’라는 욕을 먹었고 심지어 예수를 팔아넘긴 ‘유다’에 비유되기도 했다. 극우보수진영에서는 고르바초프라는 고유명사를 중오와 모멸의 대상으로 치부할 정도였다.

고르바초프는 대통령 취임연설에서 “나는 씨앗을 심지만 수확을 볼 수 없을지 모른다. 소련사회의 개혁에 필요한 씨앗을 많이 심어 두어야 하는 것이 나의 임무이다”고 했다. 자신의 개혁, 개방정책이 결실을 맺기도 전에 정치적 운명이 끝날 지 모른다고 한 것인데 그의 불길한 예감은 적중했다. 결과론적인 얘기이지만 그에게는 불과 5년의 정치생명이 주어졌을 뿐이어서 개혁의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고르바초프는 당서기장에 취임하자마자 ‘이대로 살아갈 수는 없다’며 소련의 당면 위기를 공개적으로 인정함으로써 대응코자 했다. ‘우리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것이다‘라는 그의 언급은 소련 사회에 내재된 숫한 불합리와 불평등, 추악한 현상들을 솔직히 인정하고 그러한 인식하에 본질적인 변화를 추구하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이어 과거에는 생각할 수도 없는 자유화조치와 개혁, 개방정책 추진으로 소련 사상 처음으로 대중적 인물로 부각되었다.

대중적 인기를 기반으로 고르바초프는 1990년 3월 최초의 소련 대통령이 되면서 당 서기장보다는 대통령이라는 직위를 통해 통치했다. 주요 현안을 처리하는데 보수강경파가 다수인 정치국을 우회하고자 한 것인데 공산당을 통한 통치는 더 이상 먹혀들기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강경보수파 쿠테타로 ‘도전받지 않는 지도자’ 위상 내리막길

그는 기본적으로 공산주의는 폐기의 대상이 아니며 개혁·개방의 노력에 따라 얼마든지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로 바뀔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 의미에서 공산주의자로서의 기본적 자세에서 벗어나지 않으려 했다. 그의 온건적 개혁노선은 보수우파로부터는 적대시 대상이 됐고 체제 파괴를 원하는 옐친 주도의 급진파에 의해서는 압도되어야 할 대상이 되었다. 어느 진영으로부터도 환영받지 진퇴양난의 처지로 몰리게 된 것이다. 러시아의 어느 유명한 작가는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를 “이륙은 했지만 어디에 착륙할 지는 아무도 모르는 비행기”에 비유하기도 했다.

고르바초프는 집권 초기만해도 ‘도전받지 않는 지도자’로서의 위상을 굳힌 듯 했다. 그의 단골 메뉴인 개혁, 개방이 국내는 물론이고 해외에서도 열렬한 지지를 받으며 그럴 듯하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현실은 점차 그의 낙관적 의도와는 다르게 변해갔다. 페레스트로이카에 저항하는 기득권층인 노멘클라투라(당료)들의 끊임없는 방해공작과, 극우보수파와 급진좌파의 협공, 동료들의 배신, 그리고 개혁을 빨리 정착시켜 성과를 보이겠다는 과욕으로 사태를 악화시켰다.

고르바초프의 위상은 하루가 다르게 계속 내리막길이었다. 특히 숙명의 라이벌 옐친이 주도하는 러시아와 각 공화국들이 민족주의와 주권선언 기치를 내걸며 연방정부의 목줄을 조였다. 그런 악화일로의 상황에서 1991년 8월 강경보수파에 의한 쿠데타 사건은 고르바초프에게 회복할 수 없는 타격을 가했다.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 [사진=뉴스핌DB]

쿠데타 사건 직후 권력의 지형이 완전히 바뀌었다. 고르바초프의 버티기와 옐친의 밀어내기 게임이 본격화되었지만 그 결과는 보나마나 너무나 뻔했다. 옐친 러시아 대통령은 고르바초프의 소련정부를 무시하고 소련의 정부기구를 모조리 러시아 정부 소속으로 편입시키는 극단적 조치를 취했다. 형식적으로 보면 모스크바에 고르바초프의 소련 정부와 옐친의 러시아 정부가 공존하는 이중권력기구가 출현한 셈이었다. 그러나 하늘에 두 개의 태양은 있을 수 없다는 건 만고의 진리가 아닌가.

옐친은 고르바초프의 소련정부가 공식적으로 내리는 명령과 지시를 마음대로 취소하거나 수정함으로써 철저하게 ‘투명인간’ 취급을 해버렸다. 이어서 소비에트 연방해체 작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쿠데타 사건 이후 옐친의 압박으로 고르바초프 당서기장 사임, 공산당 해산, 소련 대통령 사임과 소련 해체까지 4개월도 걸리지 않았다.

◆당서기장 사임-공산당 해산-소련 대통령 사임-소련해체...4개월의 드라마

1991년 12월 25일 세계가 크리스마스로 들뜨던 그날 단 한 장의 간단한 성명서와 함께 붉은제국과 고르바초프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의 정치적 운은 거기까지였다. 국가이미지가 나쁘면 아무리 좋은 제품이라도 ‘2류’로 취급받을 수밖에 없듯이 고르바초프의 대외이미지가 아무리 높아도 민심이 받쳐주지 않는 이상 국내에서는 ‘2류’에 머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거의 75년 가까이 테러와 강압에 의존해 독재권력을 유지해온 볼셰비키로 하여금 평화적으로 권력을 내놓도록 터를 닦은 고르바초프였지만 그 자신은 정작 국내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고르바초프는 퇴임 이후 연방해체에 대해 두고 두고 후회하고 자책했다. 자신이 선장을 맡은 소련이라는 고장난 배를 안전하게 항구까지 끌고 가 정박시키지 못했다고 말이다. 옐친의 방해 때문이라고 했다. 역사에서 ‘만약에’라는 가정을 한다는 건 부질없는 일이라고 하지만 그가 옐친을 등용하는 일이 없었다면, 그리고 운명의 8월 쿠데타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토록 가혹한 몰락의 운명을 맞게 됐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러시아 격동기를 주도한 고르바초프와 옐친의 실제모습을 쏙 닮은 입상이 모스크바 시내에 설치돼 시민들과 관광객의 기념사진 촬영용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사진=뉴스핌DB]

미완의 개혁이었지만 고르바초프의 공적은 과소평가될 수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소련과 동유럽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광범위한 개인적 자유(언론,출판,집회와 결사, 종교,여행 등)를 돌려주도록 결정적 역할을 했다. 냉전종식에도 미국보다 오히려 앞장섰다.

그는 88년 12월 유엔총회연설에서 "무력의 사용이나 무력동원에 의한 협박은 더 이상 외교의 수단이 될 수 없다"면서 "상대의 조치를 기다리지 않고 독자적으로 먼저 실천해 보이겠다"고 약속했다. 고르바초프의 연이은 군축제안은 미국을 놀라게 했을 정도였다. 동구권 국가들의 이탈, 베를린 장벽 붕괴와 독일통일, 발트해 3국의 독립선언 등 소련의 사활이 걸린 중대사태임에도 무력개입을 극력 배제함으로써 찬사를 받았다.

◆‘미완의 개혁’ 고르바초프...냉전종식-소련·동유럽 개인자유 확대 등 평가

해외에서의 높은 인기에도 불구하고 고르바초프의 리더십은 처음부터 전통적인 러시아인들의 입맛에 전혀 맞지 않았다. 러시아인들은 예로부터 엄격한 통치자를 존경하고 심지어 사랑했다. 이반 뇌제, 표트르 대제, 에카테리나 대제, 스탈린 등 철권 통치자를 위대한 인물의 기준으로 보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의 푸틴 대통령은 러시아인 취향에 딱 맞는 인물이다.

인간적인 매력과 설득력을 갖춘 민주적 성향의 고르바초프는 서구적인 의회스타일의 지도자로나 적합했다는 얘기다. 서구적인 기준에서 말한다면 고르바초프는 '매우 훌륭한 통치자이며 어쩌면 러시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도자일 것'이라는 평가도 그래서 나온다. 페레스트로이카의 기획자로 알려진 알렉산드르 야코블레프는 이렇게 고르바초프를 평가했다. "나는 고르바초프가 금세기의 가장 위대한 개혁자라고 생각한다. 예로부터 개혁자가 비참한 운명을 맞았던 러시아에서 개혁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특히 그렇다"

덧붙이자면, 서방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고르바초프는 재임시 서방 정치인 못지 않게 자신의 이미지 제고에 유달리 신경을 썼다. 그의 제스추어, 얼굴표정, 말투에 이르기까지 철저하게 계산되고 연출된 것이라고 한다. 특히 이미지 정치의 대가이자 정치적 맞수인 레이건 미 대통령을 흉내 내려고 했는지, 관련 비디오 테이프를 열공하면서 자기 스타일로 소화해 연출했다는 후문이다. 대외적으로 서방 정치인처럼 자신의 개혁 이미지를 높이는 데는 성공했지만 대내적으로 실패한 개혁가로 평가절하된 것은 아이로니하다.

러시아에서는 한동안 소련의 몰락을 초래한 결정적 원인과 장본인이 누구냐를 놓고 의견이 분분했다. 서방에 동구권을 내주는 등 양보로 일관한 고르바초프에 책임이 있다는 주장이 있는 반면 연방을 해체하는데 직접 주도적 역할을 한 옐친의 책임이 더 크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연방 해체의 결정적 계기가 91년 8월의 보수파 쿠데타 사건이라고 하는 데는 큰 이견이 없는 것 같다. 그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소련은 느슨한 형태로나마 연방이 유지될 것이고 고르바초프의 정치적 생명도 연장되었을 것이다. 어쨌든 현대사에서 일거수일투족이 역사였던 고르바초프처럼 영광과 몰락을 극명하게 상징하는 인물도 드물 것이다.

[서울=뉴스핌] 모스크바 시내 (2008.09.29.)

연방해체와 관련해 무심코 넘기기 어려운 해프닝 하나를 소개한다. 고르바초프와 옐친 모두에게 엄중한 잘못이 있다고 러시아의 한 저명한 시민단체가 문제제기를 한 것이다. 91년 12월 소련해체 직전 고르바초프와 옐친이 서로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면서 여러 차례 미국의 부시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소련해체 이후의 방향과 대책에 대해 심도있게 상의했다는 주장이었다.

소련해체와 신생 러시아연방의 향후 방침, 독립국가연합(CIS) 운영 등에 관한 최고기밀을 라이벌 국가에 제공하며 지지를 호소했다면서 이는 명백히 국가배신과 국가기밀 누설에 해당한다고 것이다. 미국의 지지가 다급했던 두 사람이 부시 대통령과 긴밀히 통화한 사실은 부인하기 어려운 것 같다. 연방해체 및 향후 대책과 같은 국가적 중대사안을 라이벌 국가의 대통령과 협의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두 사람 모두에게 불명예와 수모를 안긴 상징적인 사건이라고 할 것이다. 

▲김흥식 뉴스핌 객원논설위원

한국외대 러시아어과를 졸업하고 1977년 동양통신 기자로 언론계에 첫발을 디뎠다. 1980년 신군부에 의해 강제로 해직되는 아픔을 겪고 쌍용그룹에 몸담고 있다가 1988년 연합뉴스 기자로 복귀했다. 1991년 한국의 첫 모스크바 특파원으로 파견돼 맹활약했다. 이후 연합뉴스 북한부장, 남북관계 부장, 문화부장, 논설위원실 간사, 경영기획실장을 거쳐 편집담당 상무이사를 지냈다. 퇴임후 연합뉴스 부설 동북아센터 상임이사, 중소기업진흥공단 비상임이사, 도로교통공단 비상임이사, 방송통신심의위원회 특별위원 등을 지낸뒤 현재 뉴스핌 객원논설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khs@newspi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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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 힘들어도 환자 위했는데, 공공의 적 됐다" 전공의 '울먹' [서울=뉴스핌] 방보경 노연경 기자 = 의과대학 학생, 전공의 등은 정부가 독단적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현장의 목소리를 반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전공의 대표는 '정부가 우리를 악마화하는 과정에서 (환자와의) 신뢰를 깨고 있다'고 호소하기도 했다.  서울의대·서울대병원 교수협의회 비상대책위원회(서울의대 비대위)가 30일 개최 의료개혁 관련 긴급 심포지엄에서 박재일 서울대병원 전공의 대표는 "국민 위한 의료개혁이 올바른 방향 무엇인가를 고민했는데, 공공의 적이 돼버렸다"며 울먹였다.  [서울=뉴스핌] 윤창빈 기자 = 30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서울대학교 병원 제일제당홀에서 열린 서울의대-서울대병원 교수협의회 비대위 긴급 심포지엄에 의료진들이 참석해 있다. 2024.04.30 pangbin@newspim.com 이날 열린 심포지엄은 의대 정원 확정을 앞두고 이뤄졌다. 교수들은 의료대란의 배경 및 정부에 제시할 정책 대안을 짚었다. 김민호 서울대 의과대학 학생회장과 박재일 서울대병원 전공의대표 역시 자리에 참석해 입장을 표명했다.  특히 박 대표는 혈액종양내과에서 일해오면서 느꼈던 개인적인 소회를 털어놨다. 박 대표는 "수련받으면서 몸이 힘든 시간이 있었지만, 몸이 힘들수록 내 환자의 몸은 건강해질 거라고 믿었다"고 했다.  그는 "내과 1년차 때 맡았던 환자에게 매일 울면서 어떤 말을 해드려야 하는지 머릿속으로 생각했다. 신을 믿지 않지만 인생에서 처음으로 기도를 했다"며 "(그분을 볼 때마다) 복도로 다시 나와서 심호흡하고 커튼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걸 반복했다"며 개인적인 경험을 공유했다.  박 대표는 "2년 후 그분이 완치된 것을 보고 힘든 상황에 환자들 곁에 있고 싶어서 혈액종양내과를 지원했다"며 "회복한 환자들의 감사인사와 편지를 마음속에 품는데 정부는 전공의를 악마화해서 국민 간의 갈등을 부추기고 있다"며 말을 잇지 못했다.  이어 "자부심과 긍지 갖고 환자 곁에서 일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 달라"며 "기피과가 있다면 시스템 개선해서 모든 전공의들이 소신껏 지원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했다.  박 대표의 발표가 끝나자 30초 이상의 큰 박수소리가 이어졌다. 박 대표는 자리로 돌아간 뒤에도 휴지를 손에 쥐고 연신 눈물을 닦았다. 동료 전공의로 보이는 몇몇은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방재승 분당서울대학교병원 교수는 "교수이자 선배의사로서 부끄럽기도 하고 마음이 심란하다. 전공의 대표가 저렇게 슬픈 모습 보이는 것은 진심이 아니면 나올 수 없다"며 "정부는 전공의 복귀를 이야기하기 전에 진실된 마음으로 의대생과 전공의에게 사과해야 한다"고 말했다.  [서울=뉴스핌] 윤창빈 기자 = 30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서울대학교 병원 제일제당홀에서 열린 서울의대-서울대병원 교수협의회 비대위 긴급 심포지엄에 의료진들이 참석해 있다. 2024.04.30 pangbin@newspim.com 박 대표는 발표에서 정부가 전문직, 수련생, 노동자 등의 정체성이 혼재된 전공의의 입장을 철저히 무시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의료계는 오래전부터 의료체계 문제점 분석해 정부에게 해결책을 제시해 왔다. 하지만 정부는 보건의료정책 심의위원회에서도 알 수 있듯, 의료계 현장 목소리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고 했다.  특히 "타국과 비교했을 때 전문가 의견 태도가 반영되지 않았고, 의료개혁특별위원회까지 지속됐다"며 "정부는 의료체계 전반적 문제점을 잘못 진단하고 엉뚱한 해결책을 내놓고 있다"며 초기 진단과정부터 되짚어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민호 의과대학 학생 대표 역시 정부가 의료계와 교육에 대한 이해도가 낮다는 점을 지적했다. 김 대표는 "정부는 필수의료만이 국민의 건강을 위해 필요하며, 비필수의료는 시스템을 왜곡하는 주범인 양 몰아가고 있다"며 "저수가 박리다매 의료 시스템이 고성장 시대가 끝나자 통째로 무너져내리고 있는데, 이를 정부가 좁고 자의적인 범위로만 보고 있다"고 했다.  이어 "증원으로 교육 질 저하, 의료 질 저하 발생하면 책임 결과 또한 의료인이 같이 안게 된다"며 "학생들은 (정부 정책이) 의료와 의학을 위하는 진심 어린 정책이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김 대표는 ▲시스템적 접근 필요 ▲현장의 목소리 청취 ▲필수의료패키지 반대 등의 안건을 내놓으며 대정부 요구안을 제시했다.  hello@newspim.com 2024-04-30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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