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아름다운 가을 산행의 선명한 풍경들이며, 어찔거리는 봄날의 화사한 공기 내음, 공중에 살포시 떠도는 하얀 꽃씨들, 새치름히 피어있는 새하얀 목련꽃, 작약도에서 바람에 마구 흔들리던 빨간 작약 꽃들, 그 청량한 여름날의 유원지, 파라솔 같은 플라타너스 그늘 아래, 습기에 촉촉히 젖은 콜라 병과 그 감질나는 색감을 마주한 너와 나의 눈부신 청춘, 어머니 아버지의 젊은 시절의 사진 한 장, 청주 명암지에 나룻배를 띄워, 처녀인 어머니가 화사하게 펴든 분홍 빛 양산 아래, 시공의 푸른 물결 위를 생생하게 떠 흐르던 한 쌍의 청춘, 그 모든 아름다움, 그리움, 아련함, 먼지가 닿기 이전의 촉촉한 감성, 색감, 질감, 소리, 음색, 텅 빈 하늘, 텅 빈 충만......
그 모든 처음을 새롭게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가능성을 담뿍 배고 있는 우리들의, 삶의 무게, 혼돈의 두께, 아픔의 질량, 상처의 굴레, 왜곡의 깊이, 경직의 얼음, 그 경직의 얼음 아래를 살짝 흐르는, 빙하의 해저를 흐르는, 푸르른 바닷물, 청정한 물의 궁전, 맑은 햇살, 검게 타들어가는 아프리카 대지의 바로 위, 잔혹한 모래 폭풍 흩날리는 중동의 사막 바로 위, 피비린내 나는 살육의 현장들 바로 위, 시궁창이나 오염된 강물에서 하루하루의 끼니를 건져야 하는 구겨진 얼굴들, 그 슬픔, 상처, 칼에 베인 상흔들의 각혈하는 외침들, 바로 위에, 해맑은 햇살, 황홀한 태양, 투명한 바람, 오, 통증으로 다가오는 인류여! 명치가 아프게, 너무도 아파 소리도 못 지르고 조약돌마냥 쪼그려 앉아, 느닷없이 느껴지며 다가오는 인류의 모든 슬픈 배후여!
작약도를 순항하는 동안 나는 갑판에 선채 아주 큰 궤도를 도는 것 같았다. 작약도는 아내와 내가 사랑으로 갈 수 있었던 길목으로서의 섬을 넘어서고 있었다. 작약도는 나에게 거울이었다. 그 섬에서 얻은 시의 맨 처음 얼굴을 내게 고스란히 보여주면서 나를 고문하고 있었다.
내 마음의 청사진을 꺼내들고 허술하게 쌓아올려진 나의 건축물을 뒤흔들고 있었다. 세상과 인류에 대한 통찰까지 자아내다가 어느 순간에도 드러날 수 있는 가벼움을 툭툭 건드리고 있었다. 결혼한 후 이 섬에 왜 이렇게 늦게 왔는지 모르겠다. 그것도 혼자. 가족과 얼마든지 올 수 있었는데도 왜 올 생각조차 안 했는지 모르겠다. 아내에게 문제가 생기기 전에 같이 왔더라면 지금 내 마음에 폭풍처럼 들이차는 이런 느낌의 몇 분지 일이라도 얻어 새로운 길을 열었을 것 아닌가. 우리 부부의 추억과 사랑의 바위섬을 네 식구가 같이 걸으며 은근한 행복감이 싹트고 그것은 아이들에게 또다시 평온감으로 전해지지 않았을까.
나는 멀리 보이는 작약도에게 미안해지고 있었다. 한번만이라도 찾을 생각이 있었다면 내가 일그러지기 이전의 순연한 마음을 얼마든지 되찾을 수 있을 것이었다. 나를 생각하게 하고 되돌아보게 할 섬이었다.
그대의 밝음을 메아리로 고스란히 돌려주는 그대 앞에 선 의지의 산이 되고 싶었다는 말은 처음 한번 쓰고는 이처럼 허리가 끊어진 폐선 같은 마음에 올라 앉아 탄식으로 읊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 문장 안에 깃든 메아리가 사그러지려는 순간에 또다시 불러내어 그 맑은 탄력성을 계속 유지해야 했을 것이다. 내 안에 밝은 메아리가 늘 울려 퍼져야 그 힘으로 밝은 의지의 산이 되어 상대의 밝은 자아를 즐겁고 기쁘게 돌려줄 수 있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