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의지의 산’이 구체적인 기획과 실천, 풍성함을 갖지 못한 말장난에 불과했다는 생각이 날 아프게 했다. 내가 한 말, 내가 쓴 글에 책임도 못 지며 흘러왔다는 생각. 상대의 밝은 자아를 아무 훼손 없이 메아리로 고스란히 돌려주는 의지의 산이 되고 싶었던 순수. 그 순수가 섬광처럼 내 안에 이미지화 될 때의 기쁨, 다짐, 희망들....이것에 대해서만 더 깊게 생각하고, 삶 속에서 반성하고, 고치고 또 고치고, 새로 모색하고 도전해 보고 했더라면, 내 삶과 시의 질 모두가 훨씬 나았을텐데.
그때의 맑고 풍요로운 감성을 비난할 생각은 없다. 그때의 감성적인 이미지로부터 극단적인 자기 부정을 거치지 않고 철저히 깨지지 못함과, 보다 성숙한 소통의 광장을 향해 현실과 우둔의 벽들을 뚫고 나가지 못함이 가슴이 무너질 듯 아픈 것이다.
시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처절한 고뇌와 치열한 성찰, 비겁과 허위에 물들기 쉬운 삶 특히 생명처럼 소중한 본질들을 하나하나 앗아가고 증발시켜 버리는 궤멸과 상실의 현 시대에 시인은 어디에 설 것인가, 어떠한 시혼을 불태워야 하는가에 대한 뼈저린 통찰 속에 온몸의 육탄으로 밀고 나가야만 얻을 수 있는 숭고함에 대해 너무 안이했다는 것이다. 그저 시라고 내가 믿고 있는 관념이 표상의 둘레를 따라 대각적인 반성 없이 걸어갔다는 것. 시의 진정한 모험, 시만이 할 수 있는 새로운 발견, 시인만이 관통할 수 있는 과녁, 전혀 새로운 창조에 눈을 뜨지 못했다는 것이다.
내 삶이 그래도 ‘황량한 겨울 산’으로나마 중년의 책임을 겨우 지탱하고 있는 것이라면, 그리고 그 이면에는 오랜 기간 육화되어 온 검은 석탄 같은 묵직하고 후끈한 자원이 저장되어 있다고 한다면, 앞으로의 내 삶과 시는 새롭게, 전혀 새롭게 변해야 할 것이다. 따스하고, 풍요롭고,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고, 바닥까지 끌어안고, 스며들고, 배어 나오고, 진실되고, 단단하고, 창의적이고, 독특하고, 신뢰할 수 있고, 기본에 충실하고, 전복적이고, 횡단하고, 뚫고 나오고, 인류가 아직 만나지 못한 것, 그토록 원하나 만날 수 없는 것에 닿고, 한 시대의 에피스테메를 뛰어넘고, 우주의 비밀과 교감하고, 진정한 소통...
그런 이미지들의 압축은 발견될 수 있을까. 내 생에서. 그리고 현실 속에서. 내 몽상의 밤하늘에는 그런 이미지들의 별자리가 가끔 매혹의 탱고 춤을 춘다. 그런 성좌들이 은하수처럼 시공 전체에 어마어마하게 퍼져 있는 시의 우주는 가능할까. 이 세계 안에. 이 끔찍한 장소 안에.
그토록 아름다운 시의 우주, 풍족한 인간관계 속에서, 사랑은 굳이 사랑으로 불리지 않아도 좋을 것이며, 언어는 모든 강박과 먼지를 닦아내 창유리에 붙은 셀로판지처럼 그 안의 풍경을 투명하게, 혹은 초록이나 핑크 빛 코팅을 통해 여과해 보이게 할 것이다. 대화는 아름답고 풍요로운 이미지의 소통을 통해 깊고 즐겁고 오묘해질 것이며, 그러한 소통의 다이내믹한 지속으로서의 인생은 굳이 깨달음이니 하는 후발적인 언어를 쓰지 않아도 좋을 만큼 충분히 자족적으로 풍성할 것이다.
꿈, 소망, 환상, 명상 등은 모두 평화롭고 감각적인 현실 속에 용해되어, 인간사를 이끄는 새로운 언어 공간 속에서 사람들은 물풀 사이를 유영하는 은빛 물고기떼나, 공기 속에 찰랑거리는 푸른 버드나무처럼 유유로울 것이다. 막 자라나는 아이들을 바라보면서, 석화되어가는 어른들이 자신과의 암묵적인 비교 속에, 저 애들의 초롱초롱한 눈빛이 예쁘다거나 따갑다고 하는 거리감마저 자연스럽게 소멸되어, 아이들이 맛있게 먹는 홍시를 같이 깨물어 먹으며, 입 안 가득 차오르는 선홍빛 단물로 뱃속 가득 짜르르 시원한 퉁풍이 물결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