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캐한 담배 연기. 전광판을 오르내리는 붉고 하얀 숫자들. 객장을 꽉 메운 인파. 하루 종일 한곳만을 쳐다보는 사람들. 넘치는 긴장. 사자 팔자 아우성 소리. 아이 업은 아줌마. 잠바때기 걸친 사내들. 시도때도 없이 걸려오는 전화 벨소리. 몇 개의 전화를 동시에 받으며 자판을 두드리는 동료 브로커. 귓전을 때리는 스피커 소리...
민다나오에서 돌아온 지 일 년여 지난 1988년 봄 이후 매일 보고 겪는 풍경이다. 바퀴 빠진 기차처럼 하루하루가 흘렀다. 섬에서 돌아온 후 최선을 다했다. 그간의 별스럽고 이질적인 경험들, 어떻게 수렴해야 할지 골머리 아픈 그것들을 그나마 최선화해서 뜻에 맞는 길을 찾으려고 별별 생각을 다 했었다.
섬에 있을 때도, 그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고 있었다. 그전에 달라붙은 지독한 도그마를 세척해 나가는 동안에도. 사실 민다나오에서의 육 개월은, 극심한 갈증을 느끼던 나에게 청량제이자 삶을 새롭게 모색할 수 있도록 자양분이 되었다.
몇 번의 지독한 물감들로 지워지지 않는 얼룩이 들어버린 나의 영혼, 피곤에 절은 만신창이 나의 육체는 민다나오라는 세척기에 들어가 헹구어져, 그전의 얼룩이 다 빠지진 않았지만, 그런대로 입을만한 새옷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섬에서 돌아와 현실 앞에 섰을 때, 평생을 지속할 만한 가치 있는 일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몇 년간 정신적 외도 내지 망명을 하는 동안 세상은 많이 변해 있었다. 친구들은 이미 자리를 잡아 나가고 있었다.
그동안 까먹은 시간이 많아 더이상 지체할 나이도 아니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낭만적으로 생겨먹은 내 두뇌 구조 속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은 신문기자 외에 뾰족한 것이 없었다. 그래, 기자로 출발하자. 신문기자로 출발해 사회를 구석구석 체험하고 발판을 다져 대기자로 크든, 무엇을 하든 힘을 길러 뜻을 펴나가자.
그런 맘을 먹고 일 년간 준비해 신문사란 신문사는 다 도전했지만 줄줄이 떨어졌다. 시험에 붙은 것도 있었지만 최종에서 밀려나자 앞이 캄캄해지기 시작했다. 현주는 그래도 나를 믿고 격려해 주었다. 나보다 삼 년 아래인데도 생각이 깊고 남을 헤아려주는 따스함을 가진 여자였다.
미대 졸업 후 명동의 디자인 회사를 다니고 있었다. 같은 부서 팀장이 내 친구여서 몇 번 차를 같이 마실 기회가 있었는데 내가 민다나오에서 돌아온 후 서로 부쩍 가까워지고 있었다. 해가 저물어가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초읽기에 몰려 K그룹에 응시한 것인데 그룹 전체 합격생의 90% 이상이 증권으로 몰리는 이상한 시절이었다. 대세에 휩슬려 K증권으로 발을 일단 들여놓게 되었고, 사귀던 현주와는 입사 몇 개월 후 결혼했다.
“오를 것 같은 데요.”
“빠질 것 같은 생각이 드는데요.”
글쎄요, 기다려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 생각이 드네요....”
견디기 힘든 것은, 이런 하나마나한 말을 매일 입에 물고 있어야 하는 것이었다.
“오늘 해태전자 어떨 것 같아요?”
고객이 전화로 물어오면, 순간 가슴이 꽉 막혔다. 아무 할 얘기가 없었다. 오를 건지 내릴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모르겠습니다” 라든가 “오르든지 빠지든지 하겠지요” 라고 말하고 싶은데, 다른 말을 해야 했다. 그런 전화가 하루 수십 통 수백 통 걸려왔고 그때마다 가슴이 막혔다. 내 영업 테이블 위 면전에서도 불쑥불쑥 물어왔다. 대개 전화를 받고 있을 때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