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 그것은 태양과 뒤섞인 바다
-랭보
푸르스름한 물을 통과해 바닥의 둥글납작한 자갈, 물고기 떼, 흐느적거리는 수초들이 환히 들여다보이는 바다. 원색의 태양. 하얀 모래사장. 석양에 물들며 한가롭게 흔들리는 바나나 나뭇잎. 파인애플 향기를 취하도록 내뿜는, 여의도 몇 배 크기만 한 델몬트 농장. 몇 발작만 들여놓아도 공포를 자아낼, 칙칙하게 얽힌 정글. 판자들로 얼기설기 엮어놓은 원두막 같은 집들....민다나오다. 필리핀 남쪽 끝, 적도 근처에 있는 아름다운 섬.
제3세계의 공동체 개발을 위한 국제적인 연구소가 이 섬의 대학 내에 있다. 아시아 아프리카 각국의 NGO 관계자, 공동체 리더, 사회봉사자, 종교지도자, 수녀들이 매년 이곳에 모여 육 개월에 걸친 세미나를 갖는다. 운 좋게도 나는 이곳에 올 수 있었다. 교회개척에 이년여 투신 후 대학원에 들어가 있었는데 말엽에 연수 온 것이다. 전공이 문학에서 국제정치학으로 바뀌어 세계 평화에 관한 모델들을 연구하고 있었다. 내면적인 것에서 실천적인 것으로, 적어도 세계와 인류를 향한 뜨거움만큼은 집단 광기 같은 지하 교회의 용광로 안에서 충분히 동기부여 받은 탓이었다.
이 섬에서의 육 개월은 정말 보석 같은 시간이라 할 수 있다. 바다와 태양. 드넓은 초원과 맑은 바람. 매일매일이 새로왔다.
오전 세미나가 끝나면 되는 대로 어울려 바다에 나가거나 ‘가가얀 데 오로 시티’라는 소읍 정도 크기의 도시를 돌아다녔다. 낡은 건물, 수리한 적 없는 집들, 목재 전신주, 군데군데 깨진 도로, 칙칙한 골목, 어딘지 식민지 내음이 풍기는 도시였다.
정오 무렵에 혼자 나간 적도 있었다. 적도 부근의 이곳의 정오는 살인적으로 뜨거워 아예 낮잠 자는 시간으로 정해져 있었다. 거리엔 나 혼자였다. 텅 빈 도시. 강렬한 직사광선만이 정수리에 내리꽂고 있었다. 쓰러질듯한 빈혈기를 느끼며 텅 빈 식민지 풍의 도시를 터벅터벅 걷는 기분. 자연의 폭력. 80년대 가가얀 데 오로 시티에서만 느낄 수 있는 맛이었다.
민다나오의 중심 도시 가가얀 데 오로. 그곳은 문제투성이의 필리핀 내에서도 가장 문제가 많은 곳이었다. 마르코스 집권 말기인 필리핀은 우리나라의 유신 말기처럼 추악한 부패가 들끓는 독재 권력의 극성기였는데, 이곳 민다나오의 상황은 더욱 심각했다.
NPA라 불리는 공산 세력이 짙은 밀림에 숨어 정부군과 치열한 게릴라전을 벌이고 있었고, 무슬림 영향권 안에 있는 이 섬을 카톨릭 국가인 필리핀으로부터 분리, 독립시키려는 무슬림 원리주의자들이 시시각각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이러한 첨예한 갈등들이 시가지 한복판에서 종종 총격전으로 벌어지기도 했다. 그러한 위험 지역의 정오. 쥐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는 텅 빈 도시. 정적감. 작열하는 태양. 그 아래를 짧게 드리운 내 그림자 하나 달랑 끌고 쓰러질듯 걸어가는 내 머리 속엔 금속성만이 빛나고 있었다. 그런 식으로 해서 내 안에 꽉 차 있던 묵중한 것들이 조금씩 비워져나갔다.
치렁치렁한 밀림 속의 강을 원주민들과 나룻배를 타고 상류로 거슬러 올라간 적도 있었다. 깊은 밀림 속. 이상한 새 울음소리. 어디서 어디로 흐르는지 모를 강을 역류해, 허름한 판자때기 나룻배에 앉아 끼억끼억 올라가던 찬란한 시간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