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의 초여름 거리, 푸근한 비에 젖는다.
감성은 비에 젖는 풀처럼 푸릇푸릇 빛난다.
어제, 그녀를 만났다. 긴 세월이 흘렀다. 망각의 빗은 기억을 빗질하였고, 아무리 빨아도 남아 있는 독한 색깔의 물감처럼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는 여자.
여의도의 찻집. 정제된 시간 속의 압축파일 풀듯 머뭇머뭇 이어지는 대화. 신선한 설레임. 순간순간의 눈 맞춤 속에 그간의 세월이 아리게 흘렀고, 맑은 그녀의 눈 속에 변치 않은 순수가 빛나고 있었다. 내게 냉정하리만치, 고아하게 견지해온 순수. 방향이 조금만 틀어져도 의아한 표정을 지을 오롯함을 지닌 여자.
풋풋한 사랑이었던 나를 떠나, 고귀한 꿈을 향해 눈부신 햇살 속을 걸어간 여자. 내겐 깊은 상처를 안겨준 여자였지만, 눈빛은 아주 따스했다. 저 여자를 버티게 하는 힘이 저것 하난데, 사랑한다는 이유 하나로 내가 어찌 그녀에게 사랑의 굴레를 지울 수 있겠는가. 그녀를 붙잡으려 하지 않고 보내주는 아픔을 택한 것이 잘한 일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위와 내장이 안 좋다고 했다. 얼굴이 조금 수척해 보였고, 그 정도의 자신을 이루기까지 억센 고투가 있었음이 엿보인다.
그간 쓴 몇 편의 시를 건넸다. 내 시의 독자가 되다니.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른 채 흘러간 시간이 몇 년인데. 내 시의 중요한 축을 이루고, 아린 신앙의 맛을 알게 한 여자. 말로 하기도 벅찬 농밀의 시간 속. 애틋한 눈빛으로, 한편한편 그녀가 성의 있게 읽어가는 동안, 묘한 평온이 밀려왔다.
찻집에서 나와 헤어져야 하는 시간, 강의를 하러 가는 그녀를 따라 지하철에 다시 뛰어들고 말았다. 다녀야 할 업체 방문을 제쳐두고, 학점 빼먹는 대학 1학년의 기분으로. 웃음의 폭죽 사이로 지하철은 달렸고, 우리는 P대학 캠퍼스를 걷고 있었다.
인문학부로 걸어가는 길.
물들어가는 신록과 고색창연한 건물들. 따사로운 햇살을 머금은 화사한 공기 내음. 업체방문이 걸려, 이쯤에서 헤어질까 하던 생각이 또 보류되었다. 그녀가 잠깐 학사일을 보는 동안 벤치에 앉아 기다렸다. 약간의 비를 머금은 신선한 바람이 얼굴에 물기를 뿌려왔다. 기다림 속에 행복했고, 순수해졌다. 벤치마다 남녀 대학생들이 자연스런 포즈로 앉아 쉬고 있었다.
교회가 자기 가슴속에 있다던 아이
종소리를 들으며 이브의 가장 예쁜 딸이 되겠다던 아이
그녀를 내가 지금 기다리고 있다니. 먼 옛날, 도저히 올 것 같지 않은 이 여자를 맹목적으로, 식물인간처럼 기다리고, 기다려 기다림의 고목이 되어버린 내가. 그 기다림의 골초 속에 내가 뭉개지고, 기억이 뭉개지고, 내 힘으로는 벗어날 수 없는, 내 발로서는 일어날 수 없는 아픔 속에 겨우겨우 딛고 일어나야 했던 지난 나날이었는데. 그런 내가, 그녀를, 내 앞에 거짓말처럼 나타난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니....그녀는 먼데서 다가오며 밝게 웃었고, 나도 따라 웃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