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불같은 사랑이 어떤 강도와 점도로 타오르고 엉겨붙고 하는지 나는 모른다. 그 맹렬한 화염을 남편인 내가 이해한다고 말할 때, 나는 머저리나 등신 외에 뭘로 불린단 말인가. “다 이해하고 있으니, 그만 끝내!” 이런 지푸라기 같은 말이 그 불화로에 먹힐 것 같은가. “충분히 이해하니까, 참고 기다릴께!” 이따위 하나 마나한 말은 그들의 불화로에 휘발유가 될 뿐이다.
“이건 아냐! 이건 불륜이야! 알았어?” 이 불경스런 말은 그들의 맹렬을 가속화시킬 뿐이다. “이해할 수 없어. 씨발. 너하고는 끝이야”, “니 멋대로 해봐”, “법으로 해결해”, “다 죽여버릴거야”....그런 것들이 근원적인 해결이 되겠는가. 칼 같은 정리는 얼마나 많은 의혹과 앙금을 남기겠는가.
그들이 이해되어지는 것은 내 이해심에도 불순물이 끼어 있어 그런 것일까. 내 이해심을 내가 믿을 수 있는 것일까. 내가 이해라고 믿는 것은 실은 이해라는 환상 아닐까. 내 이해의 최대치마저 환상에 불과한 것이라면, 진정한 이해는 과연 무엇일까.
상황에 꼬이고, 상황을 인식하는 나자신에게도 꼬이고, 그 전체가 어떻게 변할지 모를 불확실성의 동아줄로 또 꼬이고 하면 결국 파멸이요, 지옥일 뿐이다. 이 지독한 인간 사슬의 연옥에서 ‘아이들 문제’를 짚으며 해결을 논의한다는 것은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폐품 취급만 받을뿐, 대단히 유치한 방식이다. 이해처럼 괴로운 것은 없다.
그들을 나로부터 놓아주는 생각도 스쳤다. 내 쪽에서 깨끗이 양보해 아내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주는 게 옳은 게 아닌가라는 생각. 그런 생각은 막막함 속에 이따금 감동적으로 흘렀는데 그때의 내 마음은 내 안에 아무것도 담기지 않고 바라보던 어릴 적 하늘처럼 맑고 싱싱했다. 내가 나를 버린다는, 생전 처음으로 결행해야 하는 행위 앞에 낯선 두려움이 앞섰지만 희한한 뿌듯함이 샘물처럼 솟아올랐다.
하지만 그런 마음은 빨리 닫히곤 했는데 그 생각을 깊게 하면 그렇게 결정되어 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내를 놓지 않는 더욱 중요한 이유는 아내에게 남아있는 사랑과, 상실 가능성을 촉매로 이상하게 더욱 뜨겁게 타오르는 질투와도 같은 연정의 불꽃, 아이들 걱정, 그리고 아내의 길이 저 길은 아닐 거라는 알 수 없는 불안감 같은 것들이었다.
그러나 실은, 나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마음의 두꺼운 얼음이 명료하게 깨져버려, 얼음물이 녹아 흘러가는 방향을 놓치지 않으려는 집요함 하나로, 마음의 노를 저어 갔을 뿐이다. 직업상 익힌 베팅이나 매사끼, 접대, 네트워크 마케팅에서 몸에 익은 끈덕진 리쿠르팅과 제품 권유 같은 기술, 평소의 게으름 같은 걸로 마음을 이끌어 나갔다면, 나는 극도의 자중지란에 빠져버렸을 것이다.
그리고 이 시대에 팽배해진 행태들, 아내에 대한 구타나 칼부림, 총기 난사, 방화, 보복적인 연애 행각, 일방적인 대화, 더러운 돈 거래, 파렴치한 망각, 간단하고 합리적인 이혼, 법정 소송, 자살 등으로 마음이 쏠렸다면 어떤 식으로든 이미 끝장났을 것이다. 그날 밤 나를 향해 던진 최영호의 몇마디는, 나의 얼음을 깨는 예리한 송곳이었다.
“당신이 아내를 더 이상 학대하지 않으면, 내가 현주를 양보할 수도 있소”
양보. 그는 ‘포기’라 하지 않고 ‘양보’라고 했다. 포기와 양보는 결과는 같지만, 대상에 대한 애정의 무게가 전혀 다르다. 상대의 행복을 위해 아깝지만 자신의 행복을 포기하는 거룩한 행위가 양보이다. 적진에서의 그 ‘용기’있는 말에 하마터면 나는 굴복할 뻔했다.
다음 날 아내는 다시 진주로 떠났다. 나는 퇴근하자마자 택시로 내리달려 아내의 친구인 미라를 찾아가 만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