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러/원 환율이 힘겹게 930원을 지키고 있다.
이달 들어 장중에는 다섯번이나 930원 밑을 맴돌았으나 종가로는 930원이 무너진 적이 한 번도 없다.
외환당국이 시장개입에 힘을 쏟은 때문이다.
외환당국은 "펀더멘털에 역행하는 환율이 문제"라며 "조만간 940원, 950원 위로 환율이 오를 수밖에 없다"고 강변한다. 때로는 "큰 손해를 볼 것"이라며 불길한 예언도 서슴지 않는다.
그러나 내년도 사업계획서를 짜느라 한창 바쁜 수출업체들은 이 같은 당국의 개입을 오히려 달러 매도헤지(selling hedge)의 기회로 여기는 분위기다.
전날(29일)에도 930원 위에서는 여지없이 수출업체들의 월말 네고 매도에 두들겨 맞았다.
이에 외환시장이 부동산시장과 닮음꼴이라는 얘기가 회자된다.
(이 기사는 30일 오전 8시 5분 유료기사로 송고된 바 있습니다.)
◆ 외환시장 부동산과 닮은 꼴?: “지금 사면 손해” vs "지금 팔면 손해“
정부가 "지금 집 사면 손해"라며 믿고 기다려 달라 했지만 부동산 값은 천정부지로 올랐다.
외환시장에서도 "조만간 환율이 오를 테니 지금 팔면 손해"라고 하지만 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시장참가자는 드문 것 같다.
글로벌 달러가 약세 일변도인 상황에서 너도 나도 달러를 던지는데 정부의 말만 믿고 기다릴 수는 없는 노릇.
사실 내년도 사업계획서를 짜기 바쁜 수출업체들은 이미 내부적으로 내년도 환율전망을 대략 정했다는 소식이다. 정부 눈치가 보여 대놓고 발표를 못할 뿐.
지난해 달러/원 환율 1,000원 안팎을 설정했던 수출업체들은 올해 표면상 950원 안팎을 상정하고 있다. 그러나 내부적으로는 800원대도 각오하는 분위기.
중공업체의 한 관계자는 "IB나 해외 유수 은행들의 보고서를 보면 2008년까지는 달러화 약세를 점치는 분위기이고 유럽 일부 은행들은 2009년까지도 약달러를 전망하고 있더라"며 "우리도 내부적으로 800원대 환율까지 각오하고 있다"고 전했다.
시중은행의 한 딜러도 "수출업체들이 내년도 사업계획서 반영 환율을 900원에서 950원 사이로 많이 잡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렇게 보면 현재 930원 환율은 헤지하기에 좋은 가격대고 실제 930원대에서 네고물량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원화뿐만 아니라 다른 아시아 통화들도 달러에 비해 최고치 행진을 펼치고 있다. 연말인 점을 감안하면 매도물량이 줄어들기보다 늘어날 가능성이 큰 상황.
이들은 정부가 마치 '환율 하락의 주범'처럼 보내는 시선이 내심 못마땅하다.
딜러들은 몇 원에 울고 웃지만 수출업체들은 "투기꾼도 아니고 900원까지 폭락할 수도 있다는 시각이 팽배한 상황에서 장이 무너지기 전 선물을 확보하려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행위"라는 항변하고 있다.
당국의 말만 막연하게 믿고 내년도 사업을 진행할 수는 없다는 입장인 것이다.
결국 서울 외환시장은 당국도 수출업체도 모두 환율하락은 반기지 않지만 옆 사람이 팔지도 모르니 나도 팔아야겠다는, 이른바 '죄수의 딜레마'에 빠진 형국이다.
◆ 죄수의 딜레마: 외환당국이 악순환 끊어줄 수 있을까?
문제는 이런 악순환의 고리를 과연 끊을 수 있느냐는 것. 또한 당국이 얼마나 버텨 줄 수 있느냐는 것이다.
두 가지 시나리오가 가능하다. 하나는 달러/엔 환율의 추가하락이 저지됨과 동시에 원화의 평가절상이 지나치다는 인식이 확산돼 930원이 지지되는 상황을 고려할 수 있다.
달러/원 환율 전망을 800원대까지 제시했던 글로벌 투자은행(IB)들이 최근 940원~975원까지 높여 잡은 것이 그런 신호를 줄 수 있을 법도 하다.
며칠 전 권오규 부총리가 "앞으로 환율 문제는 괜찮을 것 같다"고 전망한 근거도 여기에서 나온다.
다른 시나리오는 지금의 개입 방어가 하락 국면에서 단순히 '시간 지연'(time delay) 정도에 그칠 것이란 전망이다.
여러 가지 제한 여건을 고려해 보면 당국의 방어용 '실탄'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고 글로벌 달러 하락세, 연말 네고물량을 감안하면 추가하락은 불가피하다는 시각이다.
이들은 920원대에 걸쳐 있는 옵션 물량이 손절매에 나설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925원이 무너지면 900원까지는 직행할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상황이 발생할 경우 당국은 추가 대량 개입에 나설 수밖에 없고 결국 지난해처럼 외평채 발행에 따라 금리가 급등하는 현상이 발생할 수도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미국 재무장관과 버냉키 연준 의장이 다음 달로 예정된 중국 방문에서 모종의 '선물'을 얻을 경우 이 시나리오의 발생 가능성은 더 커질 수밖에 없다.
결국 930원은 이 두 가지 시나리오의 중간지점이다. 그리고 최대 변수는 글로벌 달러의 향방과 당국의 개입 의지.
"지금 사면 손해"라던 부동산 시장은 정부의 패배, 정책실패쪽으로 가닥이 잡혀가고 있다.
"지금 팔면 손해"라는 외환시장에서는 정부가 역전타를 칠 수 있을지 주목된다.
그 전에 팔고 사는 것은 어차피 시장, 거래자와 투자자들의 몫이고 책임이다. 따라서 팔고 사는 행위에 대해 정부가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보다 시장 안정을 위한 노력, 제도와 정책의 일관성 등 추진함으로써 신뢰를 얻는 자기 몫에 충실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이 많다는 점도 귀담아 들어야겠다.
◆ 당국의 ‘보이는 손’가동: 외환시장 제한된 등락 예상
월말을 맞은 국내 외환시장은 당국의 ‘보이는 손’(visible hand)에 좀더 의존할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전날(29일)에도 외환당국은 10억달러 가량을 시장에서 흡수해간 것으로 추정된다.
올해 수출이 3,000억달러를 넘는 경사가 나면서 경기둔화를 막아주고 있으나 외환시장에서는 수출 네고 탓에 환율이 빠지는 곤란을 주고 있다.
10월 경상수지가 17억달러 흑자로 두달째 흑자를 기록하며 연간 경상수지가 흑자로 전환했고 11월 수출도 여전히 호조를 보이고 국제유가도 떨어져 무역흑자 기조는 지속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재경경제부 임영록 차관보는 30일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외환시장이 심리적으로 불안할 경우 필요하다면 시장안정 조치를 강구할 것”이라며 “국제적인 공조노력과 해외투자 완화 등 수급안정을 추진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이에 앞서 국제시장에서 달러/엔 환율은 미국의 3/4분기 GDP 성장률이 당초 1.6%에서 2.2%로 수정되면서 반등했다. 달러/엔은 일본의 광공업생산이 호조를 보인 탓에 116.40선대로 반등폭이 제한됐으나 유로/달러는 장중 1.32선대를 보였다가 1.3150대로 주저앉았다. 그러나 유로/엔은 153엔대로 강세를 지속하고 있다.
뉴욕 NDF시장에서는 달러/원 선물환율이 장중 931.50까지 올랐으나 결국 밀리면서 전날과 같은930.20/931.00에 마감했다.
이날 달러/원 환율은 외환당국의 개입 경계감이 지속되는 가운데 월말 네고가 이어지며 제한된 등락이 예상된다. 달러/원 환율은 925~935원의 박스권이 형성되고 있으며 이날은 930.10원을 중심으로 928.70~931.90원, 그리고 이를 넘어서면 926.90~933.30원 수준에서 등락할 것으로 예상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