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중년 부부와 그들의 아이, 티모시
피 흘리는 여자를 안고 모텔로 들어오는 한 남자가 있다. 화면이 일시 정지되고 좀 전의 그 남자가 운전을 하고 있다. 아까 피를 흘리던 여자는 그의 부인. 옆좌석에 앉아 뭐라뭐라 이야기하는 그녀의 뒤에는 남자아이(티모시)가 타고 있다. 그러다 갑자기 타이어가 펑크나 급히 차가 멈춘다. 타이어 펑크의 주범은 여자의 하이힐 굽. 부인은 타이어를 갈고 있는 남편 옆에 있다 차안에 있는 아이와 무언의 대화를 하면서 한 발짝 뒤로 물러선다. 순간, 지나가던 차에 받혀 쓰러진다.
#. 리무진 기사(에드)와 여배우
여배우가 핸드폰으로 누군가와 통화하고 있다. 그녀를 룸미러로 쳐다보는 리무진 기사. 잘 생겼다. 여배우가 기사에게 배터리를 찾아달라고 한다. 운전을 하면서 옆 가방을 뒤지는 기사. 여자가 빨리 찾아달라 독촉하고 기사는 가방으로 시선을 돌리는 순간,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 묵직한 것이 차에 부딪친다. 차를 세우고 나가보니 피 흘리는 부인을 안고 절규하는 남자.
#. 매춘부
머리숱이 휑한 나이든 남자가 반나체로 침대에 누워있다. 배 위에 케익이 올려져 있고 나이에 맞지 않는 촛불 세 개. 여자가 노래를 부르며 촛불을 끈다. 잠시 후 장면이 바뀌고 그 나이 많은 남자와 하루 밤을 보낸 후 많은 돈을 챙겼는지 여자가 오픈카를 타고 어디론가 가고 있다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려다 스카프와 옷가지, 하이힐이 훌러덩 날아가 버린다. 당황스러워하지만, 여자는 멈추지 않고 달린다. 도로 위에 나뒹구는 여자의 옷가지들과 하이힐. 이 하이힐은 곧 일어날 재앙의 전조다. 날이 어두워지고 비가 억수로 내리고 여자는 고립된다.
#. 젊은 부부
젊은 부부가 차를 타고 가고 있다. 갑자기 한 남자가 앞을 가로 막는다. 아까 그 리무진 운전사다. 급박하게 차를 막아서면서 핸드폰을 빌려달라고 하자, 차안에 있던 남자는 빌려줄 수 없다고 거부한다. 막무가내로 핸드폰을 요구하는 리무진 운전사가 고립됐던 매춘부와 자신을 태워줄 것을 요구하고 젊은 부부는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받아들인다. 매춘부를 바라보는 남자의 묘한 시선, 그 시선이 부담스러운 여자. 그리고 네 사람은 아까 그 모텔로 향한다. 한 여성의 하이힐, 자동차 고장과 사고, 빗길에 고립되면서 사건과 사건이 서로 꼬리를 물고 연쇄적으로 돌아가는 묘한 분위기에서 여러 사람들이 목적지도 목적도 다른 채 한 모텔에 모여들기 시작한다.
#. 경찰과 살인범
잠시 후, 경찰로 보이는 사내가 수갑을 채운 살인범을 데리고 모텔로 들어선다. 그리고 도착한 순서에 따라 방 번호가 주어진다. 점점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 배정된 방번호 순으로 죽음을 맞는 사람들과 살아남은 자들의 공포가 뒤섞인다. 그때 누군가가 리무진 기사(에드)에게 말을 건낸다.
“지금 내가 누구와 대화하고 있죠?”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왠 남자들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 아까 자신에게 질문한 남자(정신과 의사) 말이다. 분명 나는 모텔에서 범인을 찾고 있었는데…. 누가 범인인지 이야기는 곧바로 미궁으로 빠져든다. 범인으로 의심되던 살인범조차 주검으로 발견되면서 생존자들은 공포에 휩싸인다. 우리들 중 누가 이런 짓을 했을까. 모텔주인인 줄 알았던 남자는 사실 돈을 훔치려던 강도였다. 그러나 그도 범인은 아닌 것 같다. 영화는 추리에 추리를 거듭하게 하면서 범인이 아닌자들을 하나씩 제거한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하나 있다. 투숙객 명단을 살펴보니, 나이, 성별, 출생지도 다른데 한가지 동일한 것이 있다. 생년월일. “당신 이름이 뭐지요” 아까 그 방(사건 심리실)으로 돌아와서, 한 남자에게 누군가가 묻는다. 당신 이름이 뭔가요? 남자는 정신을 차리고 자신의 이름을 말한다(리무진 기사, 애드). 그러나, 거울 속에 비친 생소한 얼굴이 있다.
“이 남자가 누군가요?” 남자는 소리를 지른다. 저건 내가 아니야. 리무진을 운전하던 그 미남은 온데간데 없고 대머리의 뚱보 남자(말콤 리버스)가 거울에 비쳐진다. 이쯤되면, 뭐가 어떻게 된건지, 눈치 빠른 사람들은 이해했을까? 아까 그 미남 운전사는 지금 이 남자의 다른 인격이다. 여배우, 매춘부, 어린 소년 등등 모두 그의 다른 인격들이다. 그는 해리성 정체감장애자이며, 사람을 잔인하게 죽인 살인마로 사람을 죽였고, 그 이후 기억상실을 경험한다. 그 자신도 이렇게 많은 인격이 그 안에 살고 있었다는 걸 알지 못했다.
정신과 의사가 그에게 말을 건낸다. “당신은 다중인격장애자다. 어릴 적 충격으로 여러 인격이 같이 존재하고 당신은 지금까지 여러 사람을 죽였다. 당신이 스스로 이 인격들을 인식하지 못하면 당신은 살인죄로 죽음을 맞을 것이다. 당신은 인격들을 줄여가는 치료를 받아야 한다.”
내 안에 나도 모르는 다른 인격이 살고 있다?
‘해리성 정체감 장애’는 ‘다중인격장애’란 용어로 더 잘 알려져 있다. 한 사람 안에 여러 정체감이나 인격이 존재하는 장애(다양한 정체감, 기억, 의식 등의 통합이 실패함)로 각각 장애는 독립적이며 서로에 대해 잘 인식하지 못한다. 한 인격이 활성화되면서 다른 인격들은 잠시 활동을 멈추고 다른 인격이 활성화되면 그 기간 기억을 잃는다. 위에서 언급한 ‘해리성 기억상실’이다.
따라서 주인공 말콤은 끔찍한 살인을 저지르고 다른 인격으로 살면서 이전의 기억을 잃는다. 심지어 거울 속에 비친 자기 얼굴도 알아보지 못한다. 내 얼굴에 무슨 짓을 한 거냐고? 울부짓는 그를 회의실에 앉은 남자들이 의구심과 회의적인 시선으로 바라본다. 이런 장애가 현실적으로 존재할까? 과연? 그들의 머리는 복잡해진다. 정신과 의사가 증거자료로 제시한 말콤의 일기장은 각각 다른 사람들이 쓴 필채와 각기 다른 내용들로 빼곡이 적혀 있다. 최근 개봉된 영화 '숨바꼭질'에서는 남에 집에 몰래 들어와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자신의 집에 누군가가 들어와 살고 있는데, 정작 그 집주인은 그 사실을 모르고 각각은 그 집을 공유한다. 그런데, 내 안에 다른 인격이 살고 있고 그 인격들이 서로 각자 행세하며 그 때마다 내 자신이 달라진다면,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은 일이다.
얼마 전 종영된 tvN 드라마 '갑동이'(2014)에서 연쇄살인마는 자신의 죄를 벗기 위해 해리성 정체감 장애자 연기를 한다. 그러나 그의 훌륭한 연기에도 불구하고 사소한 실수로 결국 거짓이 드러난다. 영화 '프라이멀 피어'에서도 에드워드 노튼은 자신의 살인을 정당화하기 위해 해리성 정체감 연기를 완벽하게 해낸다. 그의 무죄를 입증코자 무료 변론을 해준 변호사 리처드 기어마저도 그의 연기에 완벽하게 속는다. 그러나, 그가 무죄로 석방되는 날, 변호사는 뜻밖의 이야기를 듣는다. 지금까지의 모든 이야기는 거짓이며, 속임수라는 것을. 자신을 변론해준 변호사를 향해 야유의 미소를 짓는 에드워드 노튼의 연기는 영화 말미에 대반전을 연출한다.
드라마 '갑동이'와 영화 '프라이멀 피어'처럼 종종 이 장애는 어떤 목적에 의해 조작될 수 있고 최면과 피암시성이 높아 규명하기가 어렵다는 점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해리성 정체감 장애는 한사람에게 다양한 인격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다. 각각의 인격상태는 별도의 이름이 있고 각각 과거력, 자아상, 정체감을 갖고 있다고 한다. 일차적인 정체감은 수동적이고 의존적이며 죄책감과 우울감을 가지고 있으나, 교체되는 다른 인격은 적대적이고 공격적이며, 이 다른 인격들이 번갈아 지배권을 가지며 한 정체감이 다른 정체감을 희생시키거나 갈등을 일으킨다.
영화 '아이덴티티'에서도 각각 정체감들이 운전사, 여배우, 매춘부, 형사, 부부, 아이 등 독립된 캐릭터로 존재한다. 극중 캐릭터들이 사라져가는 것은 누군가 강력한 정체감(영화에서는 의외의 인물인 남자아이 ‘티모시’가 가장 강력한 정체감으로 등장하는데, 말콤이 어렸을 때 창녀로부터 태어나고 학대를 받았다는 기술로 보아, 어렸을 때 받았던 학대로 인한 분노와 적개심이 영화 말미에 드러난다. 티모시는 혼자 살아남아 새 인생을 살아가는 매춘부를 찾아가 “매춘부 따위에게 새로운 삶이란 없어”라며 그녀를 죽이고, 감옥으로 후송 중 정신과 의사를 목 졸라 죽인다)이 다른 정체감들을 희생시키는 것이다.
이 적극적이고 강력한 정체감이 보다 완벽한 기억을 소유하며 다른 정체감들을 지배한다. 해리성정체감 장애는 전술했듯 매우 기이한 정신장애로 극히 드물다. 이 장애로 진단된 사람들에게서 공통적으로 어렸을 때 심각한 신체적, 성적학대의 증거가 나타난다. 스트레스 상황에서 자신들의 상상 속에서 심리적 실체를 부여하고 자신과 분리된 것으로 경험한다(보통 사람들도 사랑하는 사람이 죽는다면, 한동안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멍한 상태에서 정서와 이성이 ‘해리’되는 경험을 할 수 있다).
드라마 '갑동이'와 영화 '프라이멀 피어'의 범죄자들은 ‘해리성 정체감 장애(다중인격)’를 자신의 범죄를 덮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했다. 이런 거짓말이나 교묘한 술책은 반드시 가려내 대가를 치르게 해야 한다.
그러나 진짜 정신이상이나 이상심리가 주는 함의는 이런 문제로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기울임으로써 근본적 대책을 강구하는 것이다. 즉, 어떤 병이 있거나 심각한 정신적 문제를 가진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겪어야 할 고통을 대신 겪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의 고통을 다른 사람들이 배려하고 돕고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며, 차후에 비슷한 문제를 가진 사람들에게 해결책을 제시함으로써 사회가 점점 살기 좋은 사회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어린 아이들이 당할 수 있는 학대나 유기, 방치는 결국 그들이 성인이 되었을 때 병리적인 행태로 나타날 수 있고 무고한 타인과 사회에 위협을 줄 수 있기 때문에 더욱 더 주의가 필요하다.
■아이덴티티
- 2003, 감독- 제임스 맨골드, 출연- 존 쿠삭, 레이 리오타, 아만다 피트
- 폭풍우가 몰아치는 어느 밤. 이런저런 사람들이 폭풍우를 피해 외딴 모텔로 들어선다. 리무진 운전사와 여배우, 경찰과 살인범, 라스베이거스 매춘부와 신혼부부, 어딘가 좀 수상해 보이는 모텔 주인까지 총 11명은 연락조차 끊겨버린 호텔에 갇히게 된다. 불길함이 엄습한 가운데, 이들은 하나 둘씩 누군가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그들을 죽이는 자 누구인지 정체를 알 길이 없고, 모두들 공포에 휩싸이는데, 그들의 공통점이 발견된다. 성별도 나이도 다른 그들의 생년월일이 모두 같다는 것... 이건 누군가 그들을 죽이기 위해 꾸민 시나리오인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도대체 누가 이런 짓을 꾸몄을까.
박소진 한국인지행동심리학회장('영화 속 심리학' 저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