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시간들 역시 보이는듯 하다. 앨범 사진에 들어 있는 발랄한 대학 시절. 그 이전, 하얀 유니폼을 입고 화사하게 웃음 짓는 고교 시절. 흑백사진에 담긴 유년. 꽃신을 신고, 댕기를 맨. 고사리 같은 손으로 풍선을 들고 서 있던 어느 봄날의 유원지. 집 화단 앞에 새치름히 앉아있는 모습. 박하사탕처럼 입안 가득 화! 하게 다가올 그리움들. 현주라고 이름 짓기 이전 고유한 익명성으로서의 신비로운 상태....그리고 알 수 없는 시간들....
수채화의 묘미는 한 물감 이전의 다른 색깔들의 물감을 비쳐 보이게 함으로써 겹겹의 물감의 부피가 총체적으로 투명성과 개방성을 지니는 데 있다. 즉 수채화에서의 물감은 열려있는 창이다. 다른 물감의 침묵과 비밀을 여는 창....그런데 힘든 것은, 이러한 열린 의식을 향한 우리의 경험이 현실 속에선 헤아릴 수 없이 복잡하고 불투명하게 얽혀있다는 사실이다.
특히 삼각관계의 경험. 그 하나하나의 각을 떼어 따로 보거나 인접한 두개의 각끼리 겹쳐보면 그지없는 투명성과 밝음, 아름다움을 지닌다. 하지만 그것들이 얽히고 설키는 상황 속에 들어가면 투명성과 밝음, 아름다움은 실종되고, 불투명하고 얼룩얼룩한 자국만 남는다. 그런데 과연 투명성과 밝음, 아름다움은 실종되어 버리고 마는 것일까. 이 불가능의 가능을 추적하는 것이 내 괴로운 체험이 걸어가야 하는 역경이요 비경의 길이다. 그것이 불가능하면 모든 것이 끝장나므로. 가능하면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으므로.
최영호와 현주와의 관계는, 나의 망원경으로는 잘 보이지 않는 먼 곳에 어두컴컴한 음영 뒤에 있다. 거기에서 엉겨붙고 어쩌고 하는 것같은 상상에의 집착은 나를 미치고 발악하게 만든다. 거기다가 나의 존재 자체가 무의미하고 그들의 사랑 사이에 낀 불순물로까지 여겨지면 나 자신이 초라해서 견딜 수가 없다.
그들의 관계는, 수채화이고 싶은 나의 마음, 그들 역시 수채화라고 믿고 싶은 나의 소망을, 검은 물감으로 확 눌러버리는 불길한 유화인가. 내 눈에 보이지 않는 그들의 불투명은 정말 불투명한 것인가. 어쩌면 그 불투명은 소위 나의 투명보다도 훨씬 투명한 것이어서, 내 눈으로는 불투명하게 보이는 것은 아닐까.
아! 때려죽여도 시원찮을 연적과 내 아내 사이의 불투명이, 소위 나의 투명보다도 투명할 수 있다는 가능성. 그에 대한 믿음. 그것만이 구원이요, 희망이었다. 실빛 같은 희망이어도 거기에 신뢰의 배터리가 내장되어 있다면 끝까지 붙잡고 늘어져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내가 스스로 꺼버려야 할 호롱불일지도 몰라서 그 생각만으로도 나는 가슴이 턱턱 막히곤 했다. 문제는 사랑인데 진짜 죽을 맛의 사랑이었다.
이쯤에서, 대학 졸업 직전 예상치 않게 만난 안암동 지하교회, 그곳에서의 기이한 체험을 잠시 얘기하고자 한다. 그곳에서의 사 년 동안 상상하기 어려운 엄청난 것들을 겪었지만 그중 뚜렷한 한가지가 연상되기 때문이다. 즉, 내가 쳐다보지도 않던 것, 아예 존재조차 몰랐던 것, 나 밖의 어떤, 전혀 이질적인 것 속에 내가 찾던 바로 그것, 곧 진실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에 섬뜩하리만치 확연히 눈을 뜨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운명과, 운명을 실은 인연이나 문명, 역사라는 배는 때론 걷잡을 수 없는 격류를 타고 흐른다는 것, 그 끔찍한 흔들림, 급변, 단절, 재앙스러움만이 줄 수 있는 잔혹함과 매혹에 대해서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