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밤늦게 혁이를 불러내, 몇 병의 소주를 마셨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속이 허하게 쓰려 일어나니 늦은 아침 그의 하숙방이었고, 내 머리 맡엔 그녀와의 대화를 토막토막 갈겨놓은 대학노트 한권이 펼쳐 있었다.
“사랑을 사랑으로 느낄 땐 대상이 있어야 하는 거야. 그동안 우린 서로의 대상이 되어 왔어. 나라는 존재가 아주 미미하지만 너에게 조그만 대상은 되어왔을 거야. 이제 우리가 헤어지면 서로의 대상이 없어지는 거야. 나에겐 아주 커다란 공허감이, 혜진이 너에겐 그보다 작은 공허감이 남겠지”
“난 이런대로가 좋아”
“이런대로가 아냐. 그건 있을 수 없어. 상황이 변하는 거야. 지금 순간하고 조금 후에 우리가 헤어짐을 선언한 후의 순간은 완전히 다른 시간이야”
“혜진아, 오늘 나올 때 헤어질 것 각오하고 나왔니?”
“각오는 네가 했잖아”
“아냐, 난 네 말을 듣고 싶어. 난 그동안 계속 망설였어. 언젠가 네가 나에게 너의 것을 맡긴다고 했을 때 난 어떡할지 몰라 계속 혼자 비틀거리고, 망설였어. 그렇게 많은 시간이 흘렀어. 네 얘기를 듣고 싶어”
“혜진아. 난 알고 싶어. 슬픈 거는 슬픈 거로 알고 싶단 말이야”
“무슨 말을 하라는 거야. 넌 왜 나를 자꾸 몰아붙이려고 하니?”
“나도 결론은 예감하고 있어. 너는 너무 애매해. 얘기해줘”
“처음 널 볼 때는, 난 그래, 사람들이 모두 똑같이 행동하고 사회 속의 한 무리라는 게 싫어. 그래서 고등학교 때 난 참 이상한 여자였어. 친구들하고 거의 얘기도 안하고 항상 혼자였어. 그런데 대학 입학 후에 우연히 너와 만났는데, 너 역시 나하고 비슷한 것 같아서, 난 행운이라고 생각했어. 세상엔 이런 사람도 있구나. 그런데, 계속 너와 만나면서도 한계성을 느꼈어. 난 그런 사람을 ‘소년’이라고 표현하는데, 넌 처음 그런 애였어. 그런데 난 한계성을 느꼈고, 지금은 그래도 세상은 살 가치가 있다고 느껴”
“넌 자유의 한계성을 인정하지 않니?”
“한계성은 극복될 수 있는 거야. 그래서 서서히 커가는 빈 마음 속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는 거야”
“혜진아, 우린 참 이상하지?”
“오늘은 안 만나는 게 좋았을 거야. 우연히 만난 것처럼 우연히 헤어져야 되는 거야”
“너 나하고 헤어진 후에 명랑해질 수 있니?”
“없어”
“명랑해지려고 노력해야 해”
“나도 신을 믿지 않는다면 너처럼 자살이니 죽음이니 많이 찾았을 거야”
“바보, 너하고 난 아주 바보구나”
“그래 바보가 좋은 거야”
“이 불쌍한 여자. 너 가엾어 죽겠다. 내가 도와줘야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