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주야, 어디에 있니? 기분은 나아졌니? 난 기분이 좋다. 내 마음 속에선, 이미 넌 내 안에 있어. 두려운 것은, 가혹한 사랑의 네트워크야. 너를 잇는 저쪽의 남자와, 그를 잇는 부인과 자식들. 그 엉킨 타래 속에서 너는 얼마나 고통스럽니?
네가 진주로 떠난 후, 주혜, 경혜 데리고 학교 운동장에서 놀았다. 추운 날씨에도 경혜는 막무가내로 잠바도 벗어던졌고, 짦은 반바지 차림으로 뛰어다녔다. 저 애의 저 빛나는 에너지는 어떻게 발휘되고, 부대낄 것인가. 미래는 더 어려운 시대라는데. 그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추위 속을 신나게 달리는, 빛나는 경혜. 경혜를 뒤쫓아 안아주면서, 나는 자꾸 사람들이 영혼으로 보였다.
거리, 시장통, 지하도를 메운 인파들, 진행중인 에너지, 리어카를 끄는 사람, 이어폰 낀 여대생, 오뎅과 순대를 파는 아줌마, 낮술에 취한 노인, 데이트 하는 청춘남녀, 엄마 잃어 우는 아이, 우리, 우리의 자식들, 인류 영혼의 거대한 네트워크.....화단의 꽃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을 보면서도, 눈시울이 불쑥불쑥 뜨거워진다.
10.13. 새벽 4시. 아파트 베란다에서
새벽 네 시의 어둑한 적막. 베란다로 나와 밖을 내다본다. 저 앞 버드나무 숲이 바람에 일렁일렁하는 모습이 짐승의 근육 운동 같아 보인다. 쉭쉭 부는 바람 소리는 혈액순환처럼 들린다. 거대한 짐승의 내장 속. 나는 그 속에 들어와, 숨을 죽이며 생명 운동을 지켜보고 있는 것만 같다. 이런 상상은 처음이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삼 일간 잠 한숨 못잔 내 두뇌는 72시간 동안 계속 에너지 소모 중이다. 평소보다 몇 백배 강한 자장 속에서. 이를테면 72시간을 내리 잠 못 이루고 두뇌를 풀 가동하고 있는 셈이다. 어떤 존재가 내 머릿속에 들어앉아, 전압을 높여가며 정신의 수위(水位)를 올리는 느낌이다.
또다른 상상. 밀물 썰물이 교차하던 바닷물이, 썰물로 빠져나간 후 밀물로 돌아오지 않아, 푸른 물 찰랑이던 이곳에 빈 바다의 공허만이 찬란한 우수의 빛깔을 띠며 빛나고 있다. 갈매기는, 바다에 어울리는 울음 아닌 괴이한 소리를 내며 공허 위를 날고 있고, 생의 박동이 멎어버린 허무의 바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그대는 또 어디에 있는가.
안녕, 아직은 자고 있겠지? 어디에서 자는지는 모르지만 조금 있으면 일어나렴. 내가 냉수도 떠주고, 힘들면 옷도 갈아입혀 줄께. 오랜만에 새벽의 신선한 손이 되어, 너의 얼굴을 만져보고 싶다. 현주야, 잘 잤니? 이제 맑은 공기 마시며, 무겁던 앙금 다 뱉어버리고, 새벽의 까치 뱃 속으로 들어가는, 저, 저 푸른 공기. 그 공기로 내부를 세척하고, 밝은 기지개 켜며, 일어나 봐라.
현주야, 평소완 전혀 다르게, 내가 너무 조잘거리고 있지? 우습지? 이건, 내 영혼의 목소리야. 모든 것이 새로운, 계집애들 시선 같은. 또 눈물이 흐르며, 피곤한 머릿속이 생기로 젖고, 견딜만 해져.
정말 오랜만에, 간절히 기다리는 자리에 선 기분이 겸허하고 신선하다. 십여 년 전 여름. 내가 기자 시험 준비한다고 명동의 플라타너스 그늘 아래 일간신문을 보면서, 네가 다니던 디자인회사에서 나오길 기다릴 때, 내 눈에 활자가 들어온 줄 아니? 온통 너뿐이었어. 네가 고속버스를 타고 날 만나러 청주에 내려왔을 때, 그날 날씨가 어땧는 줄 알아? 터미널 부근에 초여름 햇살은 눈이 부셨고, 네 맑은 안경알 속의 연보라색 아이섀도를 비추고 있었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