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핵심 요약
beta- 뮤지엄한미가 16일 로저 발렌 개인전을 개막했다
- 전시는 사진과 드로잉 경계를 넘나든 60년 작업을 조명했다
- 작가는 인간 내면과 무의식을 다룬 독자적 세계를 선보였다
!AI가 자동 생성한 요약으로 정확하지 않을 수 있어요.
-내년 2월 21일까지 '사진이면서 드로잉이기도 한 작업' 등 소개
[서울=뉴스핌]이영란 편집위원/미술전문기자=이것은 사진인가, 드로잉인가. 예술장르를 확실하게 구분짓길 좋아하는 이들에겐 로저 발렌(Roger Ballen)의 작업은 알쏭달쏭, 애매모호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사진이면 어떻고, 드로잉이면 어떤가. 모두 동시대 예술이지 않은가.

사진과 드로잉, 사진과 설치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전복적인 작업을 펼쳐온 로저 발렌이 지난 16일 한국에서 작품전을 개막했다. 그간 국내에서도 간간이 로저 발렌의 작품을 소개하는 전시가 열렸으나 본격적인 뮤지엄 개인전은 이번이 처음이다.
서울 삼청동의 뮤지엄한미(관장 송영숙)는 지난 10월 16일《Roger Ballen. The Works: Drawing meets Photography》를 개막했다. 내년 2월 21일까지 뮤지엄한미 삼청에서 열리는 로저 발렌의 이번 개인전에는 작가의 60년 예술여정을 살펴볼 수 있는 시기별 주요작품이 대거 출품됐다.
송영숙 관장은 "로저 발렌은 그간 한국서 몇번 전시를 했으나 별반 조명받지 못했다. 그런데 대구사진비엔날레에서 그의 작품을 보고 정신이 번쩍 났다. 이젠 좀 제대로 그를 조명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어 이렇게 전시를 꾸몄다"며 "그를 보면 그 나이에 그토록 자유로운 영혼이 있을까 하고 감탄하곤 한다. 그가 작품 속에 숨겨놓은 모티프들과 함께 왜 그가 사진과 드로잉을 연결하고자 했는지 잘 살펴봤으면 한다."고 밝혔다.

로저 발렌(b.1950)은 미국 뉴욕에서 태어나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작가다. 다큐멘터리 사진에서 출발한 그는 드로잉과 설치, 영상으로 작업을 확장하며 독자적인 시각언어를 구축했다. 인간의 무의식과 광기, 사회의 주변부를 탐구하는 그의 신랄하고 기이한 작품은 우리가 외면하거나 낯설게 여기는 존재들이 결국 우리 자신의 또다른 모습임을 슬며시 일깨운다.
로저 발렌은 "당신 작품은 사진이냐, 드로잉이냐?"라는 질문을 숱하게 받아온 모양이다. 이에 작가는 "(내 작품은)사진인 동시에 드로잉으로 이뤄진 무엇이다. 모든 것이 서로 얽혀 있다. 이것이 로저 발렌의 사진이다(It's a photograph, but it's made up of drawings; It's all intertwined. It's a Roger Ballen photograph)."라고 답했다. 사진인 동시에 드로잉이라는 것이다. 자신의 작업에 대해 이렇게 단호하고 깔끔하게 정의내리는 작가도 흔치 않다.
발렌의 작업세계는 프랑스 현대미술의 거장 장 뒤뷔페(1901~1985)가 창안한 '아르 브뤼(Art Brut)'와도 맥을 같이 한다. 아르 브뤼는 제도화된 미술교육과 문화적 규범 바깥에서 만들어진 개인의 충동적 창작의지에 의한 '거친 미술'을 가리킨다. 이는 치밀하게 구성된 사진 안에, 예측할 수 없는 충동과 낯선 존재들이 개입할 여지를 두는 발렌의 작업과 맞닿아 있다.
로저 발렌의 고유한 미학은 '발레네스크(Ballenesque)'라고 불린다. 사진이자 드로잉이기도 한 발렌의 작품은 마치 연극의 한 장면 같다. 동물과 사회주변부 인물, 드로잉과 사물이 마치 무대처럼 짜여진 공간 안에서 얽히고 설키며 하나의 장면을 이루기 때문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비현실적이고, 기괴한 장면은 인간 내면의 불안과 원초적 충동을 탐구하는 장이 된다.

전시를 위해 내한한 작가는 "어린 시절 북아프리카로부터 남아프리카까지 여행했다. 또 이스탄불에서 출발해 2년간 여러 나라를 여행한 '만국소년'이었다. 심리학을 전공했고, 박사학위는 지질학으로 취득했으니 사진은 전공하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사진가이자 작가다. 나는 누구를 위해 일하지 않는다. 내 자신이 내 상사다."라고 밝혔다. 심리학과 지질학을 전공하고 세계 곳곳을 무수히 누벼온 발렌의 배경이 '발레네스크'라는 독자적 예술세계를 형성한 중요한 토대였음을 확인케 한다.
이번 전시는 60여 년에 걸친 로저 발렌의 오랜 작업세계를 아우르며, 발렌 미학의 핵심을 이루는 '사진과 드로잉의 관계'가 초기 다큐 작업부터 근작까지 어떻게 변모해왔는지 살피는데 주력한다. 모두 7개 파트로 구성된 전시는 두 매체의 관계를 양식변화로 단순화하기 보다,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변화해온 과정을 다루고 있다. 이를 통해 기존의 사진사적 계보로는 설명키 어려운 발렌의 독보적 조형언어를 세심하게 훑는다.

'Part 1. 도시의 표면을 읽다'는 발렌의 19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에 걸친 초기작품으로 구성됐다. 그는 사진가 단체인 '매그넘 포토스'(Magnum Photos) 뉴욕사무소에서 근무했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폴 스트랜드 등의 작품을 지근거리서 접할 수 있었다. 최고 사진가들의 다큐멘터리 사진과 모더니즘 사진의 흐름을 폭넓게 익힌 귀한 시간이었다.
이는 이후 발렌이 여러 매체로 작업을 널뛰듯 확장하면서도 '빛과 구도'같은 사진적 요소를 작업의 축으로 삼을 수 있게 한 기반이 됐다. 특히 그는 프레임 안의 선과 형태, 빛과 움직임의 관계에 주목했다. 첫 파트에서는 이같은 바렌의 조형적 관심이 훗날 드로잉과 결합하는 작업으로 이어지는 단초를 살필 수 있다.
이어 'Part 2. 거리의 발견에서 심연의 구성으로'에서는 초기 작업에 나타난 선과 형태에 대한 관심이 피사체와의 소통과 장면의 연출로 확장되는 1980~1990년대 작업을 만날 수 있다. 〈Dorps〉〈Platteland〉연작에서 작가는 남아공 마을과 건축물, 실내공간, 인물을 촬영하며 현실에서 발견한 패턴과 선, 형태를 화면의 조형요소로 적극 활용했다. 이어 〈Outland〉연작에서는 인물과 사물, 선과 그림을 직접 배치하며 현실의 기록과 의도적인 연출이 교차하는 장면을 직조했다.

발렌은 1982년부터 1984년까지 남아공의 시골지역을 방문해 많은 사진을 촬영했다. 작가로서 이 시기가 매우 중요했는데 사진에 드로잉이 들어가기 시작한 것도 이 때부터다. 아이들이 벽에다 낙서를 했고, 그 선과 그림이 흥미로왔다. 다큐 기법으로 사진을 찍던 무렵 발렌은 전선이라든가 끈들이 벽과 바닥에 구불구불 늘어져 있는 것에 주목했다. 그리곤 그 전선의 선과 인물을 연결하고, 실과 뱀, 벽의 낙서를 연결해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Part 3. 사진, 발렌의 무대가 되다'에서는 2000년 이후 전개된 〈Shadow Chamber〉와 〈Boarding House〉연작이 소개된다. 이전 작업이 현실에서 조형요소를 조합했다면, 이 시기에는 장면을 구성하는 '연출'의 비중이 한결 커진다. 발렌은 인물과 사물 뿐 아니라 배경의 선과 여백까지 세밀하게 조율하며 자신만의 공간을 구축했다. 이 까다롭고 집요한 과정에서 사진은 더 이상 현실을 포착하는 창이 아닌, 작가가 직접 만들고 조율하는 하나의 무대가 된다.
뮤지엄한미의 높고 넓은 전시실(지하 1층)로 이어지는 'Part 4. 환영으로 태어난 드로잉과 빛의 흔적'에서는 '드로잉이 있는 사진'이 아닌 '드로잉을 촬영한 사진'을 감상할 수 있다. 〈Theatre of Apparitions〉연작이 그것으로 발렌은 어둡게 처리한 유리표면을 긁거나 지워 묘한 선과 형상을 만든 뒤, 이를 카메라로 촬영했다.

유리판을 긁어낸 흔적은 그 사이를 통과하는 빛과 어둠, 노출과 프레이밍을 통해 '환영'(apparition)으로 나타난다. 이 단계에 이르면 발렌의 사진은 드로잉을 기록하는 수단을 넘어, 그 흔적을 새로운 이미지로 창출하는 것으로 바뀐다.
2006년 무렵 발레은 남아공의 여성교도소를 일부러 찾았다. 수형수들이 마당에 모여 불을 피우는데 연기가 창문을 까맣게 만드는 것이 인상적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유리판을 긁은 작업과 창문 속 인물 연작이다.
사진과 드로잉의 결합을 통해 환영의 무대를 만든 후, 발렌은 사진 자체를 하나의 무대공간으로 전환할 수 있다는 확신이 생겼다. 연극연출가처럼 한 편의 초현실적 연극을 올리겠다는 의욕이 불타기 시작한 것. 'Part 5. 기묘한 동반자들'에서는 〈Asylum of the Birds〉〈Roger's Rats〉연작을 통해 이같은 '발렌적 공간'이 확장되는 과정을 음미할 수 있다.

각 연작에서 새와 쥐, 토끼와 고양이는 소품이나 배경이 아닌 인간의 동반자로 등장하며, 현실과 환상의 중간에 놓인 발렌적 극장을 함께 구성한다. 발렌은 "작업을 위해 나는 새와 토끼, 고양이와 개, 쥐와 거북이는 물론이고 뱀도 키웠다. 그들은 반려동물이자 내 작업의 주인공들이었다"라고 토로했다.
이어 'Part 6. 색으로 드러난 발렌의 세계'에서는 마침내 컬러 작품이 등장한다.〈Spirits and Spaces〉를 중심으로 2020년 이후의 컬러 사진이 이 파트에서 소개된다. 오랫동안 흑백만 고집해오던 발렌은 근작에서 색을 화면의 또다른 조형요소로 활용한다.
작가는 "나는 흑백작업을 사랑해 컬러를 멀리해왔다. 또 정사각 구도를 좋아한다. 그런데 선명한 색을 사용해보니 시선을 끌면서도 주변의 선과 형태, 인물과 동물 사이 관계 속에서 긴장감을 만들어냄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컬러로의 전환은 발렌이 지속적으로 탐구해온 내면의 세계를 새롭고 강렬한 방식으로 드러내고, 심화하게 했다.

한편 미술관 수장전시실에는 '선을 따라 펼쳐진 발렌의 세계: 폴라로이드 & 에칭' 파트가 조성됐다. 폴라로이드 사진 위에 직접 페인팅한 작품과 에칭작업을 통해 회화와 드로잉에 대한 발렌의 끈질긴 관심을 확인할 수 있다.
발렌에게 어떤 작가로 남길 바라느냐고 물었다. 이에 작가는 "서양의 비평가들은 나를 사진작가로 평가하지 않는다. 미술계에선 반대로 나를 사진작가라고 한다. 사진과 드로잉, 사진과 영상을 교차하며 연결하는 작업을 하다보니 양쪽 장르에서 '저 작품은 뭐지?'하는 반응이다. 그래도 나는 '연결'의 중요성을 믿는다"며 "내가 하고 싶은 질문은 자기 눈의 뒤를 볼 수 있는가다. 눈 속으로 끝없이 들어가보면 블랙홀이다. 니체의 철학인 '암흑을 바라보면 암흑이 날 바라본다'라는 말을 곱씹어보라."고 답했다. 이어 "예술도 삶도 모두 컨퓨전이다. 어떤 작가로 불리고 싶은지 묻는다면 나는 심리적 작가로 불리고 싶다. 인간 내면을 다루는 작가로 남고 싶다."고 덧붙였다.
뮤지엄한미는 로저 발렌 개인전의 공식개막(10월 16일)에 앞서 지난 9월 발렌의 영상작업을 소개하는 프리뷰 스크리닝 《미술관 B1: 다음 구역은 로저 발렌입니다》를 개최한 바 있다. 프리뷰 행상에 이어 개막한 본전시에서는 사진과 드로잉, 에칭 등 다양한 작품을 통해 발렌의 작업 세계를 본격적으로 조명한다. 관람객은 이번 전시를 통해 드로잉과의 관계 속에서 현실의 기록을 넘어 확장되는 사진의 또다른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

▲뮤지엄한미가 준비한 다양한 전시 연계 프로그램
로저 발렌의 작업세계를 더욱 깊이있게 감상할 수 있는 연계 프로그램이 다채롭게 운영된다. 작가가 직접 참여하는 아티스트 토크(10월 17일)와 작가 작품을 둘러싼 맥락과 해석을 살펴보는 전시 연계강연(11월 28일)이 열린다.
또 자신의 카메라를 들고 미술관과 주변을 거닐며 눈에 들어온 장면을 촬영하는 워크숍 '사진 산책자'(12월 2일)도 개최된다. 로저 발렌이 공간과 사물, 흔적을 바라보며 일상의 공간을 새롭게 담아냈듯 관람객도 이 워크숍을 통해 사진을 매개로 주변 공간을 다르게 바라보는 경험을 할 수 있다.
전시의 주요 주제를 중심으로 관람객들이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누는 토크 프로그램 '뮤지엄 나잇 살롱: 로저 발렌'(2027년 1월중)도 잡혀 있다. 이같은 프로그램을 통해 관람객이 작품에 대한 자신의 해석을 나누고, 전시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예정이다. 매월 마지막주 수요일 '문화가 있는 날'에도 특별행사가 열린다. 전시투어와 스터디, 체험형 워크숍 등을 통해 관람객이 전시를 다양한 방식으로 체험할 수 있도록 한다는 목표다.
뮤지엄한미 삼청 전관에서 열리는 로저 발렌 전시는 내년 2월 21일까지 계속된다. 매주 월요일은 휴관. 관람료는 성인 1만5000원, 초중고생 7500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