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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승주의 수선전도] 풍운의 역사 품은 아픈 손가락 '용산'

기사입력 : 2020년07월23일 16:27

최종수정 : 2020년07월23일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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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군· 일본군·미군 주둔지 아픔겪은 풍운의 땅
러일전쟁 이후 '한반도 영구 점령' 꿈꾼 일제의 전초기지
국가공원으로 돌아오는 용산...이젠 아픔 없어야

[편집자] 수선전도(首善全圖)는 조선의 수도 한양을 목판본으로 인쇄한 지도입니다. 대동여지도를 제작한 고산자(古山子) 김정호가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북쪽 도봉산부터 남쪽 한강에 이르기까지 당시 서울의 주요 도로와 동네, 궁궐 등 460여개의 지명을 세밀하게 묘사했습니다. 수선전도에 있는 지명들은 지금도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오승주의 수선전도'는 이 지도에 나온 동네의 발자취를 따라 지명과 동네에 담긴 역사성과 지리적 의미, 옛사람들의 삶과 숨결 등을 살펴보고 이를 통해 오늘 숨가쁜 삶을 사는 우리 자신을 되돌아볼 계획입니다.

[서울=뉴스핌] 오승주 기자 =사연없는 사람없고 사연없는 땅이 어디 있으랴만 서울 용산(龍山)의 사연은 가슴속 멍울처럼 단단하다. 외세의 역사가 핏방울로 맺힌 한국사의 아픈 손가락이다.

◆116년만의 귀환

서울 한복판에 위치해 있으면서도 허락된 사람만이 드나들 수 있었던 '금단의 땅' 용산 미군기지가 개방된다. 정부가 서울 용산 미군기지 내 장교숙소 5단지에 대한 재단장을 끝내고 다음달 1일부터 상시 개방하기로 한 것이다.

정세균 국무총리는 "1904년 일본군이 주둔한 이후 116년 만에 국민 누구나가 직접 찾아볼 수 있는 장소가 됐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서울 중심에 자리잡은 우리땅이지만 한세기가 훌쩍 넘는 동안 허락을 받아야만 드나들 수 있었던 금단의 땅 용산기지가 110년 세월을 넘어 돌아온다.

용산이라는 지명의 역사는 길다. 고려시대에 이미 용산이라는 이름이 나올만큼 한반도에서 중요한 지리적 의미를 가진다.

최사추 등이 왕에게 "신들이 노원역·해촌·용산 등지로 나아가 산수를 살펴보니 도읍을 세우기에 적합하지 않았고, 오직 삼각산 면악의 남쪽이 산의 형태와 물의 기세에 있어 부합하였습니다. 청하건대 주간(主幹)의 중심이 되는 대맥(大脈)에서 임좌병향(壬坐丙向·서북쪽을 등지고 동남쪽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지형을 따라 도읍을 건설하십시오."하니 왕이 이를 따랐다.(고려사절요 권6)

고려 숙종 6년(1101년) 10월. 개경의 수명이 쇠약해져 수도를 옮겨야 한다는 천도론이 일었다. 물색된 장소는 개경 남쪽 한양. 한양을 남경이라고 이름 붙이고 남경개창도감이라는 궁궐건설기관까지 설립해 숙종9년 5월(1104년) 남경이궁이 완성된다.(고려사절요 권7)

궁궐의 위치는 현재 경복궁과 비슷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왕조실록 태조 3년(1394년) 음력 9월 9일자 기사에는 '남경행궁의 영역이 좁아 그 남쪽을 경복궁 영역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는 점에 비춰보면 경복궁 북측, 지금의 청와대 위치로 추측되고 있다.

용산은 궁궐자리로 지정되지는 못했지만, 그 이름이 고려사에도 나올만큼 유구한 역사를 자랑한다. 고려사 지리지(고려사 권56, 지, 권제10)에 따르면 용산은 양광도 광주목의 과주에 속했다. 고려 충렬왕 10년(1284년)에 주(州)의 용산처를 승격시켜 부원현(富原縣)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나온다.

조선시대 용산은 세곡의 집산지였다. 전국에서 거둬들인 쌀과 공물 등 조세가 바다를 타고 한강으로 들어온 뒤 집결되는 장소였다.

세종실록지리지 경도 한성부에는 용산에 대해 '숭례문 밖 서남쪽 9리에 있다. 배로 실어 온 세곡을 거둬들이는 곳'으로 설명돼 있다.

물품이 많이 모이는 곳이다 보니 자연스레 사람들이 모였을 것이다. 세곡선이 도착하면 물건을 지고 나를 인력이 필수적이다. 도성에서 9리(3.5km) 떨어진 용산에는 양반과 권세가들이 모여 살던 성 안과 달리 '먹고 살기' 위한 서민들이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사람이 많다 보면 사건사고는 필연적이다.

성종5년(1474년) 음력 3월25일자 조선왕조실록 기사. 세곡을 관리하는 관청의 수장인 호조판서 이극증이 용산의 들끓는 도둑들에 대한 대책을 왕에게 보고한다.

"충청좌도와 경상도의 전세를 용산강에 정박하는데, 용산은 거민(居民·거주민)이 매우 많아 세곡을 뭍에 내릴 때 무뢰한 무리들이 틈을 엿보아 도둑질을 합니다. 청컨대 금후로는 조선(漕船)을 노량으로 옮겨 정박하게 하고, 금도군(禁盜軍)을 정하게 하소서."하니 왕이 그대로 따랐다.

세곡을 노린 도둑이 많으니 경찰력을 강화해 도둑을 잡고, 사람들이 덜 거주하는 노량진으로 세곡 하역장소를 옮기자는 의견이다.

[서울=뉴스핌] 오승주 기자 = 수선전도에 나타난 용의 모습을 닮은 용산. 2020.07.23 fair77@newspim.com

도둑도 도둑이지만, 용산은 날이 갈수록 세곡선 집하장으로 결점이 드러난다. 모래톱이 쌓여 세곡선이 정박하기 힘들게 된다. 여의도와 밤섬 등에서 보듯 한강 하류는 모래가 퇴적돼 만들어진 하천 내 모래섬이 있다.

성종 8년(1477년) 음력 11월28일. 용산포구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이뤄진다. 호조에서 아뢴다. "지금 용산의 강어귀가 모래로 차서 막혀 경상도 전세의 조운이 불편하니 청컨대 내년부터 경중의 여러 관사에 바치는 전세를 두모포(豆毛浦)에 정박시켜 수송하여 들이게 하소서."

용산포구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니 조운선 정박을 동쪽으로 옮긴 두모포(현재 서울 성동구 옥수동 동호대교 북단)로 하자는 말이다.

8년이 흐른 성종16년(1485년) 음력 4월13일에는 모래를 파내는 논의도 고려된다. 모래톱이 쌓이는 원인과 해결책이 제시되지만, 결국 '들인 공에 비해 남는 것이 적다'는 이유로 유야무야되면서 용산의 세곡 집하장으로 위세는 약화된다.

이극증이 의논하기를 "전에는 용산강의 남변에 돌산이 수중으로 쑥 들어가 있으므로, 강물의 흐름이 이것에 부딪쳐서 수세가 북쪽으로 흘렀는데 뒤에 거민(居民)들이 돌을 떠서 사용하여 물이 격세가 없어지고 남변으로 직류해 내려가니, 이로 말미암아 북변의 물이 얕아지고 모래가 메워져 이에 이르렀습니다. 신은 생각건대, 남변으로 쑥 들어간 산의 돌을 떠낸 곳에 큰 돌을 실어다가 보충하여 강물의 흐름을 예전과 같이 격세를 이루게 하고, 이어서 북변의 모래가 메워진 곳을 파내어 물길을 인도하면, 자연히 물이 북쪽으로 향하고 모래가 다시 메워지지 못할 것입니다."

정창손·윤필상·홍응·윤호가 의논하기를 "전자에 신중린이 진언하여 용산강의 모래가 메워진 곳을 파도록 청하였으므로, 대신에게 명하여 가서 살펴보게 하였는데, 공역의 어려움으로 시행하지 못하였으니 지금도 파내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툭하면 외국군대 주둔지

용산에 누적된 모래톱은 앞으로 다가올 용산의 비운을 점쳤던 것일까. 조정의 갑론을박이 펼쳐진 성종 시기에서 100여년이 흐른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면서 용산은 '왜군의 캠프'로 바뀐다.

한양 도성에서 9리(3.5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데다, 강을 끼고 있어 물품 수송이 편리하다. 게다가 평지가 넓게 펼쳐져 있어 군대 주둔지로는 안성맞춤이었다.

선조26년(1593년) 음력 2월23일 전라감사 권율의 장계다. "신이 주둔한 곳은 용산과 거리가 15리도 안 되는데, 흉악한 적들이 보복할 계책으로 한강 이남의 진들을 불러 모아 합세하여 다시 침범하려 한다는 소문이 경성에서 도망해온 사람들에 의해 여러번 발설되었습니다. 지금 용산에 진을 친 곳이 12개소라고 합니다."

용산에 진을 친 일본군은 적어도 2만명이었다. 이틀 뒤인 2월25일 도체찰사 풍원부원군 유성룡의 보고다. "15일에 충청수사 정걸이 수군을 이끌고 곧바로 용산창 아래에 다달아 왜적을 향하여 포를 쏘았는데, 강변에 진을 친 왜병이 2만명이나 되었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주둔한 용산은 현재 미군기지가 위치한 장소는 아니다. 고니시 유키나가 부대는 원효로 일대, 가토 기요마사 부대는 갈월동 부근에 주둔했다.(용산기지내 사라진 둔지미 옛 마을의 역사를 찾아서, 김천수, 발간 용산구청, 2017년 12월)

[서울=뉴스핌] 오승주 기자 = 임오군란 때 청나라 군대부터 러일전쟁 후 일본이 건설하고 미군까지 이어진 현재 용산기지가 위치한 수선전도에 표시된 둔지방의 모습.2020.07.23 fair77@newspim.com

현재 미군기지가 들어선 '용산기지'는 엄밀히 말하면 조선시대 용산이 아니다. 조선시대에는 둔지방 또는 둔지미로 불렸다.

서울역사편찬원에 따르면 조선시대 용산은 현재 마포구 일부를 아우르는 터였다. 용산방으로 분류됐다. 조선 영조 때 성 밖에 설치한 한성부 서부 9방 중의 하나다. 용산방은 도성 서쪽 무악에서 남쪽으로 뻗은 산줄기가 약현과 만리현을 지나서 서쪽 한강변을 향하여 꾸불꾸불 나아간 모양이 마치 용이 몸을 틀어 나아간 것 같고, 한강변 용산구와 마포구 경계에서는 용이 머리를 든 것 같아 용처럼 생긴 모양이라 용산이라 부른 데서 방 이름이 유래했다.

현재 행정구역으로는 마포동, 이촌동, 토정동 일대와 공덕동, 신공덕동, 염리동, 대현동, 서계동, 청파 1·2·3가, 원효로 1·2·3·4가, 문배동, 용문동, 신계동, 신창동, 산천동, 청암동, 도화동, 효창동, 도원동 일부에 해당한다.

 

[서울=뉴스핌] 오승주 기자 = 청일전쟁 때 만리창에 상륙한 일본군의 모습. 용산 일대에는 조선말 임오군란을 진압하기 위한 청나라 군대가 주둔했다. <자료=서울역사박물관> 2020.07.23 fair77@newspim.com

미군기지가 들어선 곳은 용산방이 아니라 둔지방이다. 조선 영조 때 성 밖에 설치한 한성부 남부 11방 중 하나다. 용산방과는 행정구역부터 다른 셈이다. 중앙에 둔지산이 자리 잡은데서 유래했다. 둔지산에는 둔전을 일구면서 이곳을 수비하는 둔병이 있어서 둔지뫼・둔지매・둔지미, 한자로 둔지산으로 불렀다. 현재 행정구역으로는 이태원동·동빙고동 일대와 후암동·동자동·서빙고동·용산동4가 일부에 해당한다.

용산기지에 외국 군대가 처음 진을 친 것은 임오군란(고종13년·1882년) 때다. 신식군대를 양성하는 별기군은 급여와 보급에서 좋은 대우를 받았지만 구식군대인 무위영과 장어영 군졸들은 13달간 봉급미를 받지 못하는 등 불만이 높았다. 그러던 중 겨우 한달치 급여를 받게 됐지만 쌀의 양이 턱없이 부족한데다 모래가 절반 넘게 섞여 있었다. 격분한 구식 군졸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사달을 벌인 군졸들은 당시 권력에서 물러나 있던 대원군을 찾아 애원했다. 명성황후가 충주로 도망갔고, 대원군이 다시 전권을 잡았지만 명성황후 일파의 청원을 받아들인 청나라가 군대를 조선에 파견, 대원군을 중국 텐진으로 납치했다.

당시 청나라 군대가 주둔한 곳이 둔지미다. 이후 용산기지 풍운의 역사가 시작된다.

[서울=뉴스핌] 오승주 기자 = 러일전쟁 이후 용산 일대에 새로 조성된 일본군 군영지를 이태원 방향에서 담아낸 전경사진. <자료=서울역사박물관>.2020.07.23 fair77@newspim.com

◆지금 용산은 '그 용산'이 아니다

1904년 러일전쟁은 조선왕조의 몰락이 본격화한 계기다. 누구도 이길수 없을 것이라던 러시아와 전쟁을 일본은 승리했다. 러일전쟁을 통해 조선의 지배권을 열강들에게 인정받은 일본은 둔지미 땅에 일본군 주둔지를 세운다.

일본군은 '조선 영구 주둔'을 위해 도시지역과 철도 중심지 성격을 가진 용산과 평양, 의주 세 곳을 군용지로 확정한다. 1904년 8월15일 한일의정서 제4조에 의거해 용산에서만 991만7355㎡(300만평)에 대한 토지수용을 조선 정부에 일방 통고한다.(용산 둔지미의 공간적 역사와 삶의 지속, 오문선, 향토서울 87호, 2014년 6월)

1905년 7월 26일 본격 군사기지 공사가 이뤄진다. 병력과 군수품 이동을 원활히 하기 위해 1906년 6월 서울역 앞에서 동자동, 갈월동, 남영동을 거쳐 용산역을 지나 한강으로 통하는 대로를 완성한다. 현재 용산을 가로지르는 큰 길이 일본의 침략전쟁을 위한 대륙침략로였다. 일제의 용산기지 공사는 1913년 11월 각종 건물들이 완공되면서 끝난다. 이 과정에서 수십만명이 강제 지주를 당하며 삶의 터전을 잃었다.

[서울=뉴스핌] 오승주 기자 = 일제강점기 일본이 제작한 서울 용산일대의 지도인 용산시가도. 일본군 병영과 대륙침탈을 위해 확장한 철도 등이 자세히 묘사돼 있다. <자료=서울역사박물관> 2020.07.23 fair77@newspim.com

둔지미 일대가 용산이라는 이름으로 바뀐 것은 이 과정에서 비롯된다. '용산기지 내 사라진 둔지미 옛 마을의 역사를 찾아서'에 따르면 일본군은 둔지미 일대를 '신용산'으로 불렀는데, 나중에 '신'자가 빠지면서 일대가 '용산'으로 둔갑했다.

해방 이후에도 용산기지는 여전히 군사기지였다. 1945년 9월 미국 극동군사령부가 오키나와 주둔 제24군단 예하 7사단 병력을 한국으로 이동시키며 미군이 용산에 주둔한다. 이후 1949년 7월까지 미군은 군사고문단 482명만 남기고 모두 철수했지만,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미군이 다시 한국에 투입됐다. 전쟁이 끝난 뒤인 1957년 7월 주한미군사령부가 용산기지에 정식으로 창설됐다.

미군기지는 2003년 5월 한·미정상회담에서 한미연합사령부와 유엔군사령부를 포함한 미군기지를 모두 평택, 오산으로 이전하는 내용의 합의가 이뤄졌다. 2005년 국가공원 조성을 발표한 이후 최근 반환에 속도를 내고 있다.

[서울=뉴스핌] 정일구 기자 = 21일 오후 서울 용산구 용산공원부지 내 장교숙소 5단지 개방행사가 열렸다. 사진은 이날 공개된 공원모습. 2020.07.21 mironj19@newspim.com

러일전쟁 이후 '영구적 지배'를 꿈꾸며 군 주둔지를 만들었던 일본의 야욕은 물거품이 된 지 오래다. 일본에 이어 눌러앉은 미군기지도 이제 공원으로 탈바꿈해 2029년을 목표로 한국인의 품으로 돌아온다.

왜군과 청나라 군대, 일제강점기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사람이 받은 상처만큼 용산땅도 깊은 생채기를 안고 있다. 이제는 용산의 아픔이 역사 속 기억 너머로 사라져야 할 때다.

fair77@newspi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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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음표'만 남기고... 노만석 '떳떳하게' 퇴임 [서울=뉴스핌] 김지나 김영은 기자 = 노만석(54·사법연수원 29기) 검찰총장 직무대행(대검찰청 차장검사)이 '대장동 항소 포기' 사태로 논란이 확산되자 14일 스스로 자리에서 물러났다. 퇴임사에서도 논란의 핵심인 항소 포기 과정에서의 '윗선 압력' 의혹에 대한 진실은 끝내 드러나지 않았다. 하지만 전날 노 대행이 한 언론과 진행한 인터뷰 기사에서는 항소 포기 결정에 구조적 압력이 있었음을 시사해 퇴임 이후에도 논란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 '항소 포기' 정쟁 한가운데 세워놓고...'외압 의혹'엔 입 닫은 퇴임사 이날 오전 10시 30분 대검찰청 대회의실에서 노만석 직무대행의 퇴임식이 진행됐고, 약 30분 후인 오전 11시경 퇴임사가 공개됐다. 특히 관심을 모은 대목은 대장동 개발비리 사건 항소 포기 과정에서 법무부 외압 의혹이 제기된 상황에서, 노 직무대행이 퇴임사를 통해 해당 의혹의 진실을 밝힐지 여부였다. [서울=뉴스핌] 김학선 기자 = '대장동 개발 비리 사건' 항소 포기 논란 끝에 사표를 낸 노만석 검찰총장 권한대행이 14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에서 열린 비공개 퇴임식을 마치고 차량을 타고 대검 청사를 나서고 있다. 2025.11.14 yooksa@newspim.com 하지만 이와 관련된 내용은 퇴임사에 없었다. 항소 포기와 관련해 퇴임사에서 언급된 부분은 "최근 일련의 상황에 대하여 검찰을 대표하는 사람으로서 우리 검찰의 미래를 생각하는 마음으로 저 스스로 물러나는 만큼, 일각에서 제기되는 검사들에 대한 징계 등 논의는 부디 멈추어 주시기를 부탁드린다"는 내용이 전부였다. 항소 포기 과정과 관련된 내용은 공식적으로 공개된 퇴임사에는 포함되지 않았지만, 전날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는 당시 상황과 자신의 입장이 보다 구체적으로 언급됐다. 인터뷰에서 노 대행은 "정권하고 검찰이 방향이 같았으면 무난했을 텐데 솔직히 지금은 (정권과 검찰이) 완전히 역방향"이라며 "검찰청을 폐지하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사건에 대한 결이 다른 것이 문제"라고 말했다. 그는 또 법무부가 항소 포기를 압박했다는 의혹에 대해서는 "모든 것은 나의 결정"이라고 밝혔다. 노 대행은 "윗선의 생각이 내 생각과 다를 경우 선택지는 끝까지 맞서 싸우든가 받아들이든가 딱 두 가지"라며 "(윗선의 생각을) 받아들이는 순간 그건 내 생각이고 내 결정이 됐기 때문에 이제 와서 외압을 받았다는 건 우스운 이야기"라고 말했다. 윗선에서 항소 포기를 요구했고 자신은 항소가 필요하다고 판단해 생각이 달랐지만, 끝까지 맞서 싸울 수 없었다는 점을 내비친 대목이다. 노 대행은 또 자신의 결정은 조직을 위한 일로 떳떳하다는 점도 강조했다. 그는 인터뷰에서 "사표를 쓴 날 아침 출근길에 왜 지하가 아니라 기자들이 모인 출입문으로 걸어 들어갔는지 아느냐"고 반문하며 "조직을 위해 내린 결정이었고, 그래서 떳떳했기 때문에 정문으로 출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퇴임식에서도 노 대행은 기자들이 기다리고 있는 정문으로 들어가고 퇴청했다. ◆ 與 이참에 '검찰파면법' 강행... "내부 우려를 항명으로 보는 것 안타까워" [서울=뉴스핌] 윤창빈 기자 = 더불어민주당 문금주•백승아•김현정 원내대변인(오른쪽부터)이 14일 국회 의안과에 검찰청법•검사징계법개정안을 제출하고 있다. 2025.11.14 pangbin@newspim.com 노만석 대행은 스스로 '대장동 항소 포기'에 책임을 진다며 자리에서 물러났지만, 이미 항소 포기 외압 논란이 정쟁으로 번진 만큼 검찰 조직은 외풍에 더욱 크게 흔들릴 것으로 보인다. 더불어민주당은 곧바로 검찰총장을 포함한 검사를 탄핵 절차 없이 일반 공무원처럼 파면시킬 수 있도록 하는 검찰청법 개정안('검사 파면법')을 발의했다. 민주당은 대장동 항소 포기에 반발한 검사들을 '정치검사'로 규정하며 '검사 힘 빼기' 입법에 속도를 내고 있다. 지난 7일 노만석 대행이 서울중앙지검 지휘부와 대장동 사건 수사·공판팀의 항소 의견을 수용하지 않고 항소 불허 지휘를 한 이후, 전국 검사장 18명은 노 대행에게 항소 포기 경위를 설명하라고 요구했고, 참모진인 대검 부장(검사장)들까지 노 대행을 찾아가 사임을 요구한 바 있다. 노 대행은 이에 대해 퇴임사에서 "검찰 구성원들이 검찰의 기능과 정치적 중립성 등에 대한 전반적인 우려를 내부적으로 전한 것임에도, 이를 항명이나 집단행동으로 보는 일부 시각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이라고 전했다. 이에 대해 검찰 내부망 '이프로스'에는 조희영 전주지검 인권보호관이 글을 올려 "검사의 징계를 일반 공무원보다 엄격하게 하는 것은 '정치적 중립'을 위해서라고 배웠고 그렇게 알고 있다"며 "대장동 사건 항소 포기에 대한 검찰 내부 반발을 '정치 검사들의 항명'이라고 규정하고, '검사들의 반발을 가용한 법적·행정적 수단을 총동원해 저지·분쇄하겠다'며 발의한 법안이 '검사 파면법'이라고 한다"고 비판했다. 한 검사 출신 변호사는 "유사 입법으로 검사 파면을 강화해도 실질적으로 검찰 업무의 성격상 파면 요건에 해당할 만한 사례가 많지 않을 것이고, 오히려 조직 독립성과 자유로운 의견 개진이 위축될 수 있다"면서 "이번 법안은 당장의 정치적 시그널이나 검찰 견제 성격이 강하고, 실무적으로는 큰 영향을 미치기 어렵다. 검찰의 반발을 무조건 정치적 행동으로 몰아가는 것은 위험한 발상"이라고 우려했다.  abc123@newspim.com 2025-11-14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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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 왕수복, 광대 조건 다 갖춘 인물" [서울=뉴스핌] 이지은 기자 = 신개념 국악 방송 '최한이·변상문의 작금작금' 제2화의 2-1편이 19일 종합뉴스통신사 뉴스핌 유튜브 채널 '뉴스핌TV'와 'K스팟(K·SPOT)'을 통해 공개됐다. 앞서 제1화에서는 올해 광복 80주년을 기념해 준비됐다. 제1화 '광복'에서는 제1편 '작금'을 시작으로 2편 '김구, 판소리 배우다', 3편 '이승만과 아리랑', 4편 '광복군'이 공개됐다. 제2화는 '기생'을 주제로 다루며, 이날 2-1편에서는 '왕수복, 기생이 되다'를 주제로 한 내용이 공개됐다. [서울=뉴스핌] 이지은 기자 = '최한이·변상문의 작금작금' 제2화 제2-1편이 공개됐다. 본편은 종합뉴스통신사 뉴스핌TV의 유튜브 채널 '뉴스핌TV'와 'K·SPOT'에서 확인할 수 있다. 맨 왼쪽부터 최한이, 변상문. 2025.11.13 alice09@newspim.com 왕수복은 1917년 평양에서 태어나 2003년 사망했으며, 조선 민요를 세계에 알렸던 기생이기도 하다.왕수복은 알려진 바에 의하면 성격은 쾌활하고 명랑했다고 한다. 당시 잡지 '삼천리'에서는 '왕수복의 목소리가 청아했다', '우리 민족의 한의 정서를 잘 표현했다'고 평했다. 평안남도 강동군 입성면 남경리에서 태어난 왕수복은 , 화전을 일구는 농사꾼의 4남매 중 셋째다. 아버지가 이름을 '성실'로 지었으나 할머니가 '수복'으로 바꾸었고, 훗날 불같은 사랑을 나눈 소설가 이효석은 왕수복을 '실'로 불렀다. 변사로 나선 변상문 이사장은 왕수복에 대해 "그 당시 언론에서 표현하기를 '목소리가 청아했다', '조선민족의 전통적인 정서인 한을 아주 잘 표현했다'라고 평가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어린 시절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7살 어린 나이에 부잣집 아이들 뒷바라지를 해주는 일을 했다. 그때 풍금 소리를 듣고 마음 속에 내재된 소리를 하게 되고, 이를 듣게 된 선생님의 추천으로 명륜 여자 공립 보통학교에 다니게 된다"고 말했다. [서울=뉴스핌] 이지은 기자 = '최한이·변상문의 작금작금' 제2화 제2-1편이 공개됐다. 본편은 종합뉴스통신사 뉴스핌TV의 유튜브 채널 '뉴스핌TV'와 'K·SPOT'에서 확인할 수 있다. 맨 왼쪽부터 최한이, 변상문. 2025.11.13 alice09@newspim.com 변 이사장은 "가난해서 3년 다니다 학교를 그만두게 되고, 이후 어머니한테 기생을 권유받고, 기생 권번에 입학하게 됐다. 그 학교에서 배운 내용이 '소리'였다. 가곡, 민요, 시조, 판소리 등을 배웠다"고 소개했다. 최한이 소리꾼은 "정가(가곡·시조), 민요, 판소리 등이 전통음악의 3대장이다. 저는 국악 중·고등학교를 통해 정가를 배웠는데, 변사님은 알고 계시나"라고 질문했다. 이에 변 이사장은 "시조는 가난한 사람들이 장구 장단에 맞춰서 부르는 것이고, 삼현육각 제대로 깔고 부르면 가곡이 되는 걸로 알고 있다"고 답했다. 최 소리꾼은 "'가난'이라고 말하신 것은 개그인 걸 알고 있다. 삼현육각 편성 유무에 따라 정가가 나뉘기도 한다"라며 "시조는 한시와 고시를 가지고 운율을 붙여서 부르는 노래로, 사랑방 음악이라고도 불린다"고 설명했다. [서울=뉴스핌] 이지은 기자 = '최한이·변상문의 작금작금' 제2화 제2-1편이 공개됐다. 본편은 종합뉴스통신사 뉴스핌TV의 유튜브 채널 '뉴스핌TV'와 'K·SPOT'에서 확인할 수 있다. 맨 왼쪽부터 최한이, 변상문. 2025.11.13 alice09@newspim.com 이어 "맑은 소리는 경기 민요, 한의 정서는 판소리라고 할 수 있다"라고 말하며 '진도 아리랑' 한 구절을 가창했다. 그러자 변 이사장은 "우리 음악은 애이불비(슬프지만 겉으로는 슬픔을 나타내지 않다는 뜻)하고 낙이불류(즐거워도 지나치게 들뜨지 않다라는 뜻)하다라고 표현할 수 있다. 절제의 미악이 바로 우리의 소리"라고 정의했다. 또한 변 이사장은 "왕수복은 이렇게 노래뿐만 아니라 춤, 거문고, 가야금, 해금 등 악기도 배웠다"고 말했다. 이에 최한이 소리꾼은 즉석에서 가야금 연주를 선보였다. 이후 최한이는 광대(조선 말 소리하는 사람을 표현하는 말)에 얽힌 판소리를 가창하며 "광대에는 세 가지 조건이 있다. 첫 번째는 인물치레, 두 번째 말 잘하는 사설치레, 그리고 다음이 득음이고 춤"이라며 "왕수복은 이를 다 갖춘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alice09@newspim.com 2025-11-14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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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 영향 종목

  • Lockheed Martin Corp. Industrials
    우크라이나 안보 지원 강화 기대감으로 방산 수요 증가 직접적. 미·러 긴장 완화 불확실성 속에서도 방위산업 매출 안정성 강화 예상됨.

부정 영향 종목

  • Caterpillar Inc. Industrials
    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 시 건설 및 중장비 수요 불확실성 직접적. 글로벌 인프라 투자 지연으로 매출 성장 둔화 가능성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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