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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승주의 수선전도] 2000냥 집값, 선비 가슴에 멍울 남긴 명동

영·정조 시대 한양 주택가격 등 생활사 남긴 선비 유만주
230여년전 조선 한양에도 주택가격 둘러싼 사회 갈등 엿보여

  • 기사입력 : 2020년07월16일 16:06
  • 최종수정 : 2020년07월16일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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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수선전도(首善全圖)는 조선의 수도 한양을 목판본으로 인쇄한 지도입니다. 대동여지도를 제작한 고산자(古山子) 김정호가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북쪽 도봉산부터 남쪽 한강에 이르기까지 당시 서울의 주요 도로와 동네, 궁궐 등 460여개의 지명을 세밀하게 묘사했습니다. 수선전도에 있는 지명들은 지금도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오승주의 수선전도'는 이 지도에 나온 동네의 발자취를 따라 지명과 동네에 담긴 역사성과 지리적 의미, 옛사람들의 삶과 숨결 등을 살펴보고 이를 통해 오늘 숨가쁜 삶을 사는 우리 자신을 되돌아볼 계획입니다.

[서울=뉴스핌] 오승주 기자 = 230여년 전 조선 후기 중흥기 영·정조 시대. 한양에 유만주(兪晩柱)라는 선비가 살았다. 양반 가문에서 태어나 34년이라는 짧은 생을 마감했다. 양반답게 평생 과거에 매진했다. 몇 번 응시했지만 매번 낙방했다.

이 양반, 그냥 평범하게 살다 떠났다. 집안 족보에서나 이름을 찾을 수 있을 정도다. 하지만 이 양반, 호랑이가 죽어 가죽을 남기듯 족보를 넘어 후대에 이름 석자를 남긴다.

다름아닌 '일기' 때문이다. 유만주의 삶은 평생 과거에 응시했을 뿐 특별할 것이 없었다. 하지만 '꽃송이와 같은 인간의 아름다운 정신을 흠모한다'는 '흠영(欽英)'이라는 일기가 230년의 세월을 뛰어 넘었다.

1775년부터 1787년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적은 24권의 일기 '흠영'에는 유만주가 살았던 1700년대 후반 조선의 수도 한양의 모습이 구체적이고 상세하게 담겨 있다. 당시의 사회변동과 조선 백성과 사대부의 생활, 각종 물가 등이 기록돼 있다.

현대 서민들에게도 골칫거리이자 초미의 관심사인 주택구매에 대한 고뇌도 생생히 전달된다. 

◆명동에 2000냥을 주고 집을 사다 

"집을 사는 일이 참으로 어렵구나. 모두 이와 같다면 어떤 사람이 집을 사려고 물어보겠는가."(흠영, 음력 8월6일)

유만주(1755~1788)의 본관은 기계(杞溪)다. 기계 유씨는 한양을 대표하는 명문가 중 하나였다. 조선초기부터 사육신 유응부 등 유명인사를 배출한 집안이다. 한양의 기계 유씨는 원래 옥류동(현재 종로구 옥인동)에 살았다. 18세기 중반 자손이 늘면서 남촌(남대문 인근)으로 이주했다.

종가집은 낙동(충무로), 둘째는 창동(남창동), 셋째는 수서(남대문로 4가), 넷째는 난동(회현동)에 터를 잡았다. 이 가운데 창동(남창동)이 유만주가 살던 곳이다. 현재는 남대문시장 일대다.

[서울=뉴스핌] 오승주 기자 = 유만주가 12년간 빠짐없이 기록한 일기 '흠영' <자료=서울대학교규장각한국학연구원> 2020.07.16 fair77@newspim.com

창동은 초가집이었다. 아버지 유한준의 관직이 높아지면서 번듯한 집으로 이사하고 싶어졌다. 아버지는 적당한 장소로 이동하라 했으나, 유만주는 정원이 있는 좋은 집에서 살고 싶었다. 1784년 1월부터 '집구하기'가 시작됐다. 창동과 낙동, 수서 등 여러 장소를 물색했다. 보는 집마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계약 직전까지 간 적도 있었지만, 막판에 틀어져 성사되지 못했다.

집 구하기에 나선지 7개월만이던 그해 8월. 유만주는 서울 명동에 100칸짜리 집을 구한다. 가격은 2000냥. 집값은 친척들에게 일부를 빌리긴 했지만 대부분은 사채를 끌어다 썼다. 아버지는 비싼 집을 샀다며 취소하라고 재촉했지만, 유만주는 명동 새 집에서 살고 싶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어렵사리 거금을 주고 구한 명동 집에서 1년 밖에 살지 못했다. 아버지 유한준이 파직되고 살림이 어려워지자 집을 팔고 다시 초가집이 늘어선 창동으로 되돌아 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유만주가 치른 2000냥짜리 집은 현재 시세로 얼마나 될까. 유만주는 '일생을 편히 누릴 수 있을 정도의 재산'(흠영, 1784년 9월30일자)이라고 했다.

당시 유만주 입장에서 보자. 당시 쌀값은 3되가 10문이었다.(흠영, 1784년 8월11일) 당시 조선화폐 상평통보는 엽전이라고도 불렀다. 상평통보 한 개, 엽전 한 닢이 1문이다. 1문은 1푼과 같다. '한푼 줍쇼'의 그 한 푼이 1문이다. 100문은 10전이다. 10전은 1냥이다. 다시 말해 1냥=10전=100문(푼)이다. 명동 집 가격 2000냥은 당시로 쌀 3000말 가치와 같다.

쌀 3000말이면 어느 정도 생활이 가능할까. 김대중 서강대 교수가 쓴 '1784년 유만주의 부동산거래'에 따르면 유만주는 집안 식구의 1년치 쌀 소비량을 산출한 적이 있다.(흠영, 1778년 7월23일)

[서울=뉴스핌] 오승주 기자 = 명동에 산 2000냥짜리 유만주 집의 가치. <자료=서울역사박물관> 2020.07.16 fair77@newspim.com

일기에 따르면 여덟 식구는 1년에 쌀 8섬(1섬=15말)을 먹었다. 이를 기준으로 계산하면 명동 집값 2000냥은 유만주의 식구 여덟명이 25년간 먹을 수 있는 쌀값이었다.

인하대 민경진 교수와 고려대 이철구 교수의 공동연구(2012년 9월)에서 조선시대 양반의 평균수명은 51~56세였다. 집안 식구 쌀소비량을 계산한 1778년 당시 유만주의 나이가 만 23세였던 점과 조선시대 양반의 평균 수명을 고려하면 유만주가 명동 집값 2000냥에 대해 '일생을 편히 누릴 재산'이라고 말한 점이 충분히 이해된다.

조선시대와 현대 쌀값은 생산력 및 소비량에서 차이가 있어 일괄적으로 대비하기 어렵다. 이에 따라 당시 집값과 요즘 집값을 비교해 봤다.

유만주는 일기 흠영에 명동 집값에 대한 힌트를 남겼다.

집주릅(부동산중개인)과 함께 공동(公洞)에 있는 1200냥짜리 집을 둘러 보았는데, 여섯가지 단점이 있었다. 돌아와 들으니, 한양 사대부의 저택 가운데 가장 비싼 것은 입동(笠洞) 이은(李溵)의 집인데, 집이 모두 380칸이 넘으며, 거의 한 동리의 가격에 육박한다. 통보(通寶·상평통보)로 환산하면 2만냥이 넘는다고 한다. 누군가 이렇게 말했다. "이은은 부유하기가 나라 전체 사대부들 가운데 으뜸이다."(1784년 6월11일)

당시 서울에서 가장 비싼 집이 입동(현재 종로구 종로2가·종로3가·관철동·관수동에 걸쳐 있던 마을)에 위치한 이은이라는 사대부의 집이다. 규모가 380칸, 가격은 2만냥 이상이다. 유만주가 구입한 명동 집 규모는 100칸에 가격은 2000냥이다. 이은의 집가격에 비해 10분의 1이다.

[서울=뉴스핌] 오승주 기자 = 한성부 중부 정선방 수문동 가옥 매매문서. 1757년부터 1773년까지 16년간 이뤄진 매매계약서와 거래위임장, 거래공증서 등 13장의 문서가 풀로 붙어 있다. 유만주의 집매매 문서는 아니다. <자료=토지주택박물관> 2020.07.16 fair77@newspim.com

2020년 1월 고시되고 3월말 확정된 국토부 표준단독주택 공시가격에 따르면 전국 표준단독주택 22만채 가운데 1위는 서울 용산구 한남동에 위치한 이명희 신세계그룹 회장 자택이다. 대지면적 1758.9㎡(532평)에 연면적 2861.83㎡(866평) 규모로 주택 공시가격은 올해 277억1000만원이다.

지방자치단체가 국토부 표준단독주택 공시가격을 참고해 다시 정하는 개별단독주택 공시가격에서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한국감정원이 22만 채의 표준단독주택을 선정해 가격을 정하면 지방자치단체는 이를 참고해 지자체 내의 개별단독주택의 공시가격을 정한다.

3월 공개된 전국 개별단독주택 공시가에 따르면 최고가 단독주택은 표준단독주택 샘플링에서는 빠졌지만, 실질적으로 지자체가 세금확보를 위해 산정하는 최고가 주택은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서울 용산구 한남동 자택(1245.1㎡·377평)이다. 공시가는 408억5000만원이다.

아파트의 경우 2020년 전국공동주택공시가격에 따르면 5년 연속 전국 1위를 차지한 서울 서초구 서초동 '서초트라움하우스5차'다. 1㎡당 699만2000원으로 3.3㎡(1평)당 가격은 2307만3600원이다. 가장 넓은 전용면적 273m²(83평)의 경우 공시가격은 19억원 가량이다.

실거래가를 따지자면 이건희 회장 자택은 매물로 나올 경우가 희박해 가격 환산이 힘들다. 아파트의 경우 서초트라움하우스5차 C동 매물이 130억원에 나와 있다.

서울에서 제일 비싼 이은의 2만냥 가격 집이 아파트 기준으로 130억원 정도라고 치면, 유만주의 명동 집값은 13억원 정도로 추측된다.

[서울=뉴스핌] 오승주 기자 = 수선전도에 나타난 서울 명동의 위치. <자료=수선전도>2020.07.16 fair77@newspim.com

◆230년전 조선에도 집값 둘러싼 갈등  

유만주가 살았던 영·정조 시대는 상업이 번창하고 인구가 늘어나면서 조선의 중흥기를 맞은 시기다. 통계청의 한국통계발전사(2016년12월)에 따르면 조선의 인구(16~60세 장정 기준)는 중종 때 374만5481명에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인조 때 153만1365명으로 급감한다.

이후 영조때 700만명을 회복한 뒤 정조 당시에는 732만명 수준까지 증가했다. 농업 생산력 확대와 상업이 활발해 지면서 인구 증가도 가파르게 이뤄졌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세종10년(1428년) 인구조사에서 한양 인구는 10만9000명이었다. 정조 13년(1789년) 발간된 '호구총서'에서는 한양인구가 18만9153명으로 집계됐다. 도심인 중부가 약 2만명이었던 점에 비하면 서부는 8만8000명으로 가장 많았다. 남부는 4만6000명으로 뒤를 이었다. 한강을 끼고 있는 지역으로 수도권이 확장된 셈이다. 인구가 증가하면서 도심 집값이 비싸 외곽 주변으로 가구수가 늘어나는 현상은 요즘과 비슷하다.

사람이 모이면 여러 문제가 발생한다. 특히 주택 가격은 수요·공급 원리에 따라 오르기 마련이다. 그래도 한양 사대문 안에 살던 유만주는 북촌이나 서촌처럼 현대판 강남지역으로 진출하지는 못해도 강남과 맞닿은 장소에 집을 사고 싶어했다. 주택가격은 비쌌다. 그래도 빚을 내 강남 인근 지역으로 이사했다. 하지만 아버지 유한준의 파직으로 생활이 어려워지면서 1년만에 공들여 장만한 명동집을 팔고 930냥을 주고 초가집이 줄지은 창동(남창동)으로 옮겨 간다.

[서울=뉴스핌] 김학선 기자 =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2일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으로부터 부동산 대책 관련 긴급 보고를 받고 다주택자를 비롯한 투기성 주택 보유자의 부담을 강화하라고 지시했다. 이어 정부가 상당한 주택 물량을 공급했지만 부족하다는 인식이 있으니 발굴을 해서라도 공급 물량을 늘리라고 주문했다. 사진은 3일 오후 서울 여의도 63빌딩에서 바라본 서울도심 아파트의 모습. 2020.07.03 yooksa@newspim.com

'북동(북촌)을 지나가다 보면 큰 저택과 멋진 건물들이 많다. 문호를 마주하고 있는 집들마다 높고 편하고 툭 트여 있다. 만물이 고르지 못한 것은 조물주가 생겨나게 한 바이다. 혹 말하길, 시골에는 값이 천금(1000냥) 넘는 집이 없고 백여금만 넘어도 사치하다고 손가락질을 받는다 한다. 일찍이 듣기로 서울의 큰 재물은 집값에 들어가 있고, 시골의 큰 재물은 환곡에 들어가 있다고 하는데, 참 맞는 말이다.'(1784년7월14일)

김하라 전주대학교 교수는 '흠영'을 '일기를 쓰다'라는 제목으로 두 권의 책으로 편역했다. 유만주 권위자다. 서울역사박물관은 2016년 '한양선비의 한해살이, 1784년 유만주의 한양'이라는 주제로 특별전시를 열었다. 당시 김하라 교수는 '유만주의 서울과 서울사람들'이라는 글에서 북촌에 대해 유만주가 느낀 심정을 "중산층 이하의 서민이 타워팰리스를 쳐다보며 느낄 법한 위화감과 다르지 않다"고 풀이한다.

"고급주택이 즐비한 북촌을 지나며 세상이 평등하지 못함을 느끼고 이 불만스런 감정은 다시 서울과 지방의 집값 차이로 드러나는 경향(서울과 지방)간의 격차에 대한 인식으로 확대된다. 18세기 조선이 직면한 사회경제적 문제상황을 분배정의가 구현되지 못하다는 차원에서 분석한 유만주의 시각에 따르면 북촌의 고급주택가는 조선 경제의 모순과 병폐를 환기하는 하나의 상징으로도 볼 수 있다."

[서울=뉴스핌] 오승주 기자 = 서울 명동의 모습. 평소 평일 주말 할것없이 북적대던 명동 거리가 신종코로나감염증(코로나19)때문에 한산하다. 2020.07.16 fair77@newspim.com

지금 명동은 230년 전 주택지구에서 갖가지 물건과 맛난 음식이 유혹하는 상업지구로 변신했다. 유만주가 2000냥을 들여서라도 살고 싶어하던 100칸짜리 기와집은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 산업발전과 더불어 사라진 지 오래다.

중국인과 일본인을 비롯해 외국인관광객들로 북적이던 명동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기승을 부리며 한산함을 넘어 쓸쓸함마저 느껴진다.

명동의 랜드마크 명동성당을 지나 실핏줄처럼 뻗은 골목길로 들어 갔다. 이 어딘가에 유만주가 빚까지 내면서 2000냥 거금을 들여 새로 산 뒤 행복에 겨워했을 집이 있었을 것이다. 1년만에 옷소매에 눈물을 적시고 뒤돌아 서야 했던 모습도 떠올랐다.

[서울=뉴스핌] 오승주 기자 = 서울 명동의 랜드마크 명동성당의 모습. 2020.07.16 fair77@newspim.com

무섭게 치솟는 230년 후 서울 집값을 보면서 유만주는 무슨 말을 할까. 집 때문에 가슴에 멍울진 갓 쓴 선비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해줄 수 있는 집과 관련된 조언이 무엇일지 궁금했다.

 

fair77@newspi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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