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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승주의 수선전도] '정릉의 눈물' 담긴 정릉 없는 정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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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가 조성하고 아들 태종이 해체한 신덕왕후 정릉 이름 딴 정동
태종과 '혁명동지'에서 '철천지 원수'로 돌아선 신덕왕후

[편집자] 수선전도(首善全圖)는 조선의 수도 한양을 목판본으로 인쇄한 지도입니다. 대동여지도를 제작한 고산자(古山子) 김정호가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북쪽 도봉산부터 남쪽 한강에 이르기까지 당시 서울의 주요 도로와 동네, 궁궐 등 460여개의 지명을 세밀하게 묘사했습니다. 수선전도에 있는 지명들은 지금도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오승주의 수선전도'는 이 지도에 나온 동네의 발자취를 따라 지명과 동네에 담긴 역사성과 지리적 의미, 옛사람들의 삶과 숨결 등을 살펴보고 이를 통해 오늘 숨가쁜 삶을 사는 우리 자신을 되돌아볼 계획입니다.

[서울=뉴스핌] 오승주 기자 =서울 성북구 북한산 자락 동편에 자리잡은 정릉(貞陵)은 조선 태조의 계비(繼妃·두번째 왕비) 신덕왕후(神德王后)의 안식처다. 동네 이름도 정릉동인 만큼 일대에서는 랜드마크 역할을 한다.

그런데 이 정릉의 원래 위치는 여기가 아니다. '덕수궁 돌담길'로 유명한 서울 중구 정동(貞洞)이었다.

도성 안에 능을 조성하지 않는다는 원칙까지 깨고 서울 정동에 만들어졌던 정릉이 북한산 중턱 산골짜기로 파묘천장(묘를 파서 다른 장소로 이전)한 이유에는 조선 건국을 위해 의기투합했던 두 혁명 동지가 철천지 원수로 변해가는 과정이 담겨 있다.

지금은 동네 전체가 도심속 공원 역할을 하는 고즈넉한 정동. 그러나 서울 정동에는 620여년전 '조선의 국모' 신덕왕후의 눈물과 '피의 군주' 태종의 한맺힌 노여움이 세월을 넘어 엮여 있다.

◆'조선의 국모' 눈물 스민 정동

태종 16년(1416년) 음력 8월21일. 임금이 편전에서 정사를 보다 좌우에 이른다. "계모(繼母)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유정현이 대답했다. "어머니가 죽은 뒤에 이를 계승하는 자를 계모라고 합니다."

임금이 "그렇다면 정릉(貞陵)이 내게 계모가 되는가" 하니 (유정현이) 대답했다. "그때에 신의왕후(神懿王后·태종의 생모)가 승하하지 않았으니 어찌 계모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에 임금은 "정릉이 내게 조금도 은의가 없었다. 내가 어머니 집에서 자라났고 장가를 들어서 따로 살았으니 어찌 은의가 있겠는가. 다만 부왕이 애중하시던 의리를 생각해 기신의 재제(제사)를 어머니와 다름없이 하는 것이다"고 답했다.

임금의 말에는 독(毒)이 들어 있다. 비록 생모는 아니지만 어머니로 대접해 정성껏 제사로 드리고 하지만 '내 어머니도 아닌데 내가 제사를 지내고 보살필 이유가 뭐가 있느냐'는 뼈가 섞인 말이다.

유교를 다스림의 최고 덕목으로 삼은 조선왕조에서 '유교의 수호신'인 왕이 비록 계모지만 '어머니를 어머니로 여기지 않겠다'는 파격적인 발언을 한 셈이다. 앞으로 신덕왕후에 대한 제사 등 보살핌을 끊고 방치하겠다는 선언에 다름없는 것이다.

[서울=뉴스핌] 오승주 기자 = 서울 중구 정동의 모습. 태조가 조성한 신덕왕후의 능인 정릉의 당초 위치로 추정되는 영국대사관(성당 뒤 회색건물)이 보인다. <자료=서울연구원> 2020.07.09 fair77@newspim.com

이 일에 앞서 7년전 태종은 '어머니의 묘'를 도성 밖으로 내치는 결정을 내린다. 태종(1409년) 9년 2월23일의 일이다. 이날 태종은 정동에 있던 정릉을 옮기는데 동의한다. 그날 조선왕조실록 기사다.

'신덕왕후 강씨(康氏)를 사을한(沙乙閑)의 산기슭으로 천장하였다. 처음에 의정부에 명하여 정릉(貞陵)을 도성 밖으로 옮기는 가부를 의논하게 하니 의정부에서 상언하기를 "옛 제왕의 능묘가 모두 도성 밖에 있는데 지금 정릉이 성안에 있는 것은 적당하지 못하고, 또 사신이 묵는 관사에 가까우니 밖으로 옮기도록 하소서." 하였으므로 (태종이) 그대로 따랐다.'

태조 승하(1408년 음력 5월24일) 9개월만이다. 신덕왕후가 묻힌 정동의 정릉을 지금의 서울 성북구 정릉동으로 옮겨버린 것이다. 왕릉을 옮기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수맥이 흐르거나 터가 좋지 않다는 등 이유로 천장할 수 있다. 세종대왕 영릉의 경우도 처음에는 경기도 광주에 있었지만 1469년(예종 원년) 풍수지리상 길지를 찾아 옮겼다. 세종 이후 문종, 단종, 세조, 예종 등 19년간 왕이 4번이나 바뀌고, 세조와 예종의 장남이 잇따라 요절하자 천장을 단행했다.

그러나 정릉은 도성 안에 있어 불편하다는 탐탁지 않은 명분을 들어 북한산 중턱으로 옮겼다. 이후 200년 이상 정릉은 산골짜기에 방치된다.

태종에 비해 아버지 태조는 정릉 조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조선 건국의 정치적 동지이자 공신이나 다름없던 신덕왕후의 위상을 높이 샀던 만큼 정릉 건설공사를 직접 챙겼다.

태조와 신덕왕후는 보통 사이가 아니었다. 아내이자 조선건국 과정의 건국공신이었다. 만남도 심상치 않았다. 먼 길 달려온 장수가 목이 말라 물을 찾자 우물가 처녀가 버들잎을 띄워 급체를 막는다는 스토리를 담고 있다.

[서울=뉴스핌] 오승주 기자 =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뻗은 서울 정동의 모습. 2020.07.09 fair77@newspim.com

한국고전종합DB에 따르면 다산 정약용이 쓴 다산시문집 제14권 신덕기적비첩에는 태조와 신덕왕후의 만남을 묘사한 설화가 있다.

"옛날 우리 태조께서 여름철에 말을 달려 계곡을 지나다가 매우 갈증이 나므로 개울에서 빨래하는 한 여자를 보고 물을 떠오게 하였다. 그 여자는 일어나서 즉시 물을 떠오는 데 버들잎 한 움큼을 물에 띄워가지고 바쳤다. 태조가 노하여 '왜 버들잎을 섞었는가?' 하니, 그 여자가 '더울 적에 물을 급하게 마시면 몸에 해로우므로, 그것을 불면서 천천히 마시게 하려는 것입니다'고 하였다. 그러자 태조가 그를 매우 기특하게 여겨 말에 태워가지고 함께 돌아왔는데, 그가 바로 신덕왕후였다."

이 버들잎 설화는 고려왕조 건국에도 인용된다. 고려 태조 왕건이 나주 지방을 지날 때 그 지역의 오씨 성을 가진 여성이 물을 찾는 왕건에게 버들잎을 띄운 물을 바쳐 혼인에 이른다. 훗날 고려 2대왕 혜종의 어머니가 되는 장화왕후다.

1396년 음력 8월13일 신덕왕후가 판내시부사 이득분의 집에서 승하하자 태조는 열흘 뒤인 8월 23일 직접 자리를 살펴 취현방 북쪽에 능지를 정했다. 현재 정동 영국대사관 부근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왕릉은 도성 안에 있을 수 없고, 도성 밖에 조성한다는 원칙도 무시한 채 경복궁에서 멀지 않은 장소에 정릉을 세웠다.(조선 태조비 신덕왕후 정릉의 조성과 봉릉 고찰, 황정연, 서강인문논총 46, 2016년 8월)

그러나 태조가 이처럼 공들인 정릉은 철저히 해체된다. 조선왕조 태종실록 9년(1409년) 음력 4월13일 기사에는 정릉이 파괴되는 이야기가 묘사돼 있다. 봉분은 자취를 없애고 석인(왕릉 좌우에 세우는 문인·무인상)을 땅에 묻었으며 정자각은 헐어 그 자리에 터를 높게 쌓아 태평관을 짓는 데 사용했다.

이듬해인 1410년 8월 청계천 광통교가 홍수로 무너지자 정릉의 병풍석을 광통교 돌다리를 복구하는데 사용했다. 원형을 황폐화시킨 것은 물론 제례의 대상에서도 제외했다.

[서울=뉴스핌] 오승주 기자 = 청계천 광통교 아래 받침돌로 사용된 정릉의 병풍석. 능침을 둘러싼 병풍석에는 불교와 도교 등을 표현한 문양과 조각이 새겨져 있다. 2020.07.09 fair77@newspim.com

서울 청계천 SK그룹 사옥 옆으로 흐르는 청계천에 광통교가 있다. 다리 아래 석축벽에는 일반 돌과는 다른 다양한 무늬와 그림이 새겨진 조각석이 자리 잡고 있다. 정릉을 둘러싼 병풍석이다. 부처를 정교하게 새긴 조각과 도교의 영향을 받은 구름무늬 등은 600년 세월이 흘렀어도 당당한 위품을 자랑한다. 거꾸로 뒤집힌 부처상도 있다.

뭇 백성들이 밟고 지나가면서 수모를 겪으라는 의미로 해체돼 옮겨진 정릉 병풍석은 역설적으로 수백년이 지나도 기품을 잃지 않은 모습으로 백성들과 함께 하고 있다.

◆'혁명동지'에서 '철천지 원수'로

태종이 정릉을 '철천지 원수'처럼 파괴했지만, 처음 이들은 '혁명동지'였다. 태조가 '왕씨의 고려'를 지우고, '이씨의 조선'을 건국하는데 태종과 신덕왕후는 힘을 합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태조 이성계가 요동정벌에 나선 군사를 이끌로 개경으로 돌아온 위화도회군 당시 남아 있던 태조의 가족들은 '역적'으로 몰려 죽음의 위기에 처한다. 이 때 신덕왕후와 훗날 1차 왕자의 난(무인정사) 당시 죽음을 피할수 없었던 방번·방석 등 왕후 소생의 배다른 두 동생을 구한 사람은 다름 아닌 태종이었다.

태조실록 1권 총서 89번째 기사다. '처음에 신의왕후(태종의 생모)는 포천 재벽동에 있고, 강비(신덕왕후)는 포천 철현에 있었는데, 전하(태종)가 서울에 있으면서 변고가 발생했다는 말을 듣고 말을 달려 포천에 이르렀다. 전하가 왕후와 강비를 모시고 동북면을 향하여 가면서 말을 탈 때든지 말에서 내릴 때든지 모두 친히 부축해 주고, 스스로 허리춤에 불에 익힌 음식을 싸 가지고 봉양하였다. 경신공주·경선공주·무안군·소도군이 모두 나이 어렸으나 또한 따라왔으므로 전하께서 자기가 안아서 말에 태우고 길이 험하고 물이 깊은 곳에는 전하가 또한 말을 이끌기도 하였다.'

긴박한 상황에서도 태종이 신덕왕후와 그 자식들까지 직접 말에 태워 음식을 먹였다는 기록이다. 태종은 목숨을 건 도주에서 태조의 계비와 그 자식들까지 챙긴 것이다.

[서울=뉴스핌] 오승주 기자 = 수선전도에 표기된 정동. 소정동과 대정동으로 나눠져 있을만큼 규모가 상당했음을 알수 있다. <자료=수선전도>2020.07.09 fair77@newspim.com

조선 창건의 걸림돌로 지목된 정몽주를 태종이 개성 선죽교에서 죽인 이후 태조 이성계가 크게 화가 났을 때 신덕왕후가 태종을 옹호하는 장면도 조선왕조실록에 나온다.

'전하(태종)가 "몽주 등이 장차 우리 집을 모함하려고 하는데, 어찌 앉아서 망하기를 기다리는 것이 합하겠습니까. 몽주를 살해한 이것이 곧 효도가 되는 까닭입니다"고 하였다. 태조가 성난 기색이 한창 성한데, 강비(신덕왕후)가 곁에 있으면서 감히 말하지 못했다. 전하(태종)가 말하기를 "어머니께서는 어찌 변명해 주지 않습니까" 하니 강비가 노기(怒氣)를 띠고 고하기를 "공(태조)은 항상 대장군으로서 자처하였는데, 어찌 놀라고 두려워함이 이 같은 지경에 이릅니까"라고 하였다.'

정몽주를 죽인 태종이 화가 머리 끝까지 치민 태조 앞에 불려가 뭔가 사달이 벌어지려 할 때였다. 태종이 신덕왕후를 보면서 '나를 변호해 달라'고 하니, 신덕왕후가 태조에게 '태종이 결단력있게 일을 잘 처리했는데, 왜 몰아 세우느냐'면서 옹호한 것이다.

눈여겨볼 대목은 태종이 신덕왕후에게 '어머니'라고 불렀다는 점이다. 앞선 태조의 위화도회군 당시 목숨이 벼랑 끝에 달린 시점에서 태종이 신덕왕후의 자식들까지 안전하게 대피시킨 점도 '어머니'로 여기지 않으면 할 수 없는 행동이다.

하지만 이들 '혁명동지'는 조선건국 이후 '불구대천의 원수'로 갈라선다. 아버지와 남편을 새 왕조의 임금으로 세우는 과정에서는 '혁명'을 위해 뜻이 맞았지만, 태조가 신덕왕후의 아들 방석을 세자로 세우자 태종은 두 번에 걸친 왕자의 난을 일으켜 신덕왕후의 대를 끊어 버린다.

◆정릉의 부활

200년 이상 방치된 정릉은 현종 10년(1669년) 송시열의 상소 등으로 촉발된 서인들에 의해 복구된다. 신덕왕후는 왕비로 복위되면서 종묘에 위패가 모셔진다. 무덤도 왕후의 능으로 복원된다. 지금의 서울 성북구 정릉이다.

태종과 악연이 맺힌 정릉의 복원은 서인의 정략에 따른 것이라는 견해가 많다. 남인과 대립하던 서인은 정치 주도권을 잡기 위해 정릉과 신덕왕후 복귀를 이슈로 삼았다.

당시 서인과 대립하던 남인도 마땅히 반대할 명분이 없던 터라, 정릉 복위를 수차례 반대 끝에 결국 현종이 받아 들였고, 정국은 서인이 좌우하게 됐다.

200여년간 버려졌던 정릉이 제대로 왕릉의 격식을 갖추고 종묘에 배향되자 하늘에선 비가 내렸다.

실록은 이렇게 전한다. '능침을 봉하고 제를 올리던 날 소나기가 정릉(貞陵) 일대에 갑자기 쏟아져 백성들은 그 비를 일러 세원우(洗冤雨)라고 하였다.'(현종개수실록 1권, 현종대왕 행장)

[서울=뉴스핌] 오승주 기자 = 서울 성북구 정릉동에 위치한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의 정릉. 태종이 내친 정릉은 현종 때 송시열 등 서인에 의해 복원된다. <자료=문화재청> 2020.07.09 fair77@newspim.com

정동은 '신덕왕후의 눈물'뿐 아니라 조선시대 당파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정릉을 복위시킨 서인의 발원지다.

조선후기 학자 이긍익이 지은 사서인 연려실기술 선조조고사본말(宣祖朝故事本末)에 따르면 선조 5년(1572) 이조 참의로 있던 심의겸은 당시 과거 장원 급제자 김효원이 이조 정랑에 추천되자 그가 어릴 적에 권신 윤원형의 식객이었다는 이유를 들어 반대했다.

늦게야 이조 정랑이 된 김효원은 심의겸의 아우 심충겸이 이조 좌랑의 추천에 오르자 외척(명종의 처남)이라는 이유로 이를 반대해 저지시켰다. 이후 심의겸과 김효원은 반목이 생기고, 조신들은 심의겸을 옳다고 하는 파와 김효원을 옳다고 하는 파로 나눠졌다. 심의겸의 집이 서울의 서쪽인 정동에 있었고, 김효원의 집이 동쪽인 건천동에 있어 동인과 서인의 이름이 생기게 됐다.

태종의 악연과 당쟁의 발원지에 이어 정동은 조선의 험난한 역사가 묻어 있다. 조선말 문호 개방 이후 미국과 영국, 러시아 등 각국 공사관이 들어선 땅이다. 고종이 궁궐을 버리고 러시아대사관에 몸을 피한 아관파천을 비롯해 구한말 열강의 다툼이 치열하게 벌어진 장소다.

[서울=뉴스핌] 오승주 기자 = 현재 서울 정동의 모습. 동네 전체가 공원이라고 할만큼 역사의 굴곡에도 불구하고 고즈넉하다. 2020.07.09 fair77@newspim.com

현대 서울의 정동은 동네 전체가 공원이다.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경향신문사 방향으로 길은 고즈넉히 뻗어 있다.

정동 남쪽 초입 덕수궁 돌담길을 걷다보니 이문세의 '광화문 연가'가 떠오른다. 이제 모두 세월 따라 흔적도 없이 변했지만, 덕수궁 돌담길엔 아직 남아 있다. 다정히 걸어가는 연인들도 있지만, 동네 전체가 공원인 듯한 넉넉한 모습 속에 조선의 아픔도 함께 서려 있다.

fair77@newspi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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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러값 떨어지자 '사자' 몰렸다 [서울=뉴스핌] 박가연 기자 = 달러/원 환율이 큰 폭으로 하락하면서 달러화 선취매가 늘어난 영향으로 지난달 거주자외화예금이 역대 최대를 기록했다. 달러화예금도 처음으로 1000억달러를 넘어섰다. 한국은행이 28일 발표한 '2026년 7월중 거주자외화예금 동향'에 따르면 7월 말 기준 외국환은행의 거주자외화예금 잔액은 1283억4000만달러로 전월 말보다 150억1000만달러 증가했다. 잔액 기준 역대 최대치로 지난해 12월 기록한 종전 최고치인 1194억3000만달러를 7개월 만에 넘어섰다. 월간 증가폭도 지난해 12월 158억8000만달러에 이어 역대 두 번째로 컸다. [자료=한국은행] 거주자외화예금은 내국인과 국내 기업, 국내에 6개월 이상 거주한 외국인, 국내에 진출한 외국기업 등이 국내 은행에 예치한 외화예금을 말한다.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달러화예금은 1089억2000만달러로 전월보다 111억2000만달러 증가해 역대 최대를 기록했다. 달러화예금 잔액이 1000억달러를 넘어선 것은 관련 통계 작성 이후 처음이다. 전체 거주자외화예금의 84.9%를 차지했다. 달러/원 환율이 지난 6월 말 1549.4원에서 7월 말 1424.0원으로 한 달 새 125.4원 떨어지면서 달러화 선취매가 늘어난 영향이다. 대기업의 경상대금 수취와 증권사의 외화채권 발행자금, 고객예탁금 유입도 달러화예금 증가에 영향을 미쳤다. 유로화와 엔화예금도 증가했다. 유로화예금은 일부 기업의 경상대금 수취 등으로 전월보다 22억2000만달러 늘어난 80억6000만달러를 기록했다. 엔화예금은 일부 기업의 배당금 지급 목적 예치와 증권사의 외화채권 발행자금 유입 등으로 15억달러 증가한 86억1000만달러로 집계됐다. 위안화예금은 전월보다 2000만달러 증가한 12억9000만달러를 기록했다. 영국 파운드화와 호주 달러화 등이 포함된 기타통화 예금은 14억6000만달러로 전월보다 1억6000만달러 증가했다. 예금 주체별로는 기업예금과 개인예금이 모두 늘었다. 기업예금 잔액은 전월보다 135억7000만달러 증가한 1125억6000만달러로 전체 외화예금의 87.7%를 차지했다. 이 가운데 기업의 달러화예금은 전월보다 101억1000만달러 늘어난 956억9000만달러로 집계됐다. 개인예금은 157억7000만달러로 한 달 새 14억4000만달러 증가했다. 개인이 보유한 달러화예금도 10억1000만달러 늘어난 132억3000만달러를 기록했다. 은행별로는 국내은행의 외화예금 잔액이 1023억9000만달러로 전월보다 96억1000만달러 증가했다. 외국은행 국내지점은 259억5000만달러로 54억달러 증가한 것으로 집계됐다. eoyn2@newspim.com 2026-08-28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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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재판관 미임명' 한덕수 5년 구형 [서울=뉴스핌] 백승은 기자 = 내란특검이 윤석열 전 대통령의 탄핵을 저지할 목적으로 헌법재판관을 임명하지 않았다는 혐의를 받는 한덕수 전 국무총리에게 징역 5년을 구형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3부(재판장 이진관)는 28일 직무유기 등 혐의를 받는 한 전 총리와 정진석 전 대통령 비서실장·김주현 전 대통령실 민정수석·이원모 전 공직기강비서관의 결심 공판을 열었다. 한덕수 전 국무총리 [사진=뉴스핌 DB] 한 전 총리는 윤 전 대통령의 직무가 정지됐던 지난 2024년 12월 대통령 권한대행을 역임하며 국회가 추천한 헌법재판관 후보자 3인(마은혁·정계선·조한창)을 의도적으로 임명하지 않았다는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당시 마은혁 재판관이 헌법재판관 후보자로 채택되자 그가 진보 성향 판사 모임인 우리법연구회 회원인 점, 판사 임관 전 운동권 조직과 진보 정당에서 활동했던 점 등이 대두되며 보수 진영의 비판이 이어졌다. 특검은 한 전 총리가 이런 상황을 참작해 윤 전 대통령의 탄핵 인용 결정을 저지하려는 목적으로 마 재판관의 임명을 104일간 미루고, 마용주 대법관 임명도 3개월 넘게 미뤘다고 본다. 또 지난해 4월 적법한 인사 검증을 거치지 않고 윤 전 대통령의 측근으로 알려진 함상훈·이완규 후보자를 헌법재판관 후보로 지명했다는 직권남용 권리행사 방해 혐의도 있다.  특검 측은 최종 구형을 통해 "피고인들은 국회가 선출한 헌법재판관을 임명하지 않아 헌법재판소의 정상적인 구성을 방해하고 국회 동의까지 모두 마친 대법관마저 임명하지 않아 사법부의 정상적인 구성까지 지연시켰다"며 "그 결과는 국정과 헌법기관의 마비였다"고 밝혔다. 이어 "공무원이 행사하는 권한은 본래 공무원 자신의 것이 아니라 국민의 것이다. 그런데 이 사건 피고인들은 권한을 위임한 국민을 배신했다"고 비판했다. 아울러 "(이들의 행위로) 국민이 국가기관의 공식적인 절차를 믿을 수 있다는 신뢰, 그리고 최고위 공직자가 국민 앞에서 하는 말을 믿을 수 있다는 최소한의 신뢰까지 훼손됐다"고 짚었다. 특검 측은 "불의한 권력 앞에서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것보다 헌법과 양심을 지키는 것이 공직자의 의무라는 것을, 국민이 맡긴 권한을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사용했을 때는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책임이 따른다는 것을, 이 판결을 통해 분명하게 남겨 주시기 바란다"고 재판부에 요청했다. 이날 특검은 함께 재판에 넘겨진 정 전 비서실장과 김 전 민정수석은 모두 징역 4년을, 이 전 비서관에게는 징역 3년을 구형했다. 100wins@newspim.com 2026-08-28 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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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 영향 종목

  • Lockheed Martin Corp. Industrials
    우크라이나 안보 지원 강화 기대감으로 방산 수요 증가 직접적. 미·러 긴장 완화 불확실성 속에서도 방위산업 매출 안정성 강화 예상됨.

부정 영향 종목

  • Caterpillar Inc. Industrials
    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 시 건설 및 중장비 수요 불확실성 직접적. 글로벌 인프라 투자 지연으로 매출 성장 둔화 가능성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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