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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치우의 외계인 수첩]'히틀러의 눈빛' 패션디자이너 유지영

기사입력 : 2020년05월21일 11:11

최종수정 : 2020년05월26일 18:06

[편집자] '삶'이라는 글자를 해체하면 ㅅㆍㅏ ㆍㄹ ㅏㆍㅁ 이 된다. 사람이 문명을 연다. 사람이 문화를 빚고 오롯이 역사가 된다. 그래서 미래를 위해 사람을 관찰하고, 사람을 알처럼 품는 것이다. 

국가대표급 크리에이터로 통하는 오치우 빅브라더스 대표가 글로벌뉴스통신사 뉴스핌을 통해 '외계인채집'이라는 생경한 이름으로 주 1회 인터뷰를 연재한다. 문화계를 비롯한 각계각층과의 세밀하고 주관적인 만남 속에서 지구 곳곳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매력 넘치고 독특한 인간 모습들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오치우 빅브라더스 대표

오 대표는 소설 목민심서 250만부 판매전략 [사람을 좋아하는 책] 캠페인, 실패상황 정복전략 [프로는 실패로 배운다], 최초의 중소기업 채용전략 기획, 청바지 점핑 프로모션전략, 중저가 다이아몬드 특화판매전략 등 처음이라는 수식어를 달며 기발한 아이디어와 기획으로 광고·카피라이터 업계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패션디자이너 유지영은 안젤리나 졸리를 닮았다.

미국영화배우 중 가장 괴팍하고 실제로 쌈 잘하는 배우는 존보이트였다. 그의 딸인 안젤리나 졸리가 허리우드에서 '쎈여자' 캐릭터로 각광을 받는 건 우연이 아니다.

헌데 한국의 패션디자이너 유지영의 '쎈여자' 스토리는 뜬금없다. 1990년대 이대대학원까지 나오고 당시 큰 돈을 벌던 패션 디자이너의  경험치고는 참으로 생경하다. 

''그때 비싼차를 타고 다녔어요. 트렁크를 닫으려고 하는데 옆구리에 칼이 훅 들어오는 거예요. 소리치면 죽인다구요. 눈 가리고 손을 묶어서 어디론가 가는데 문득 생각이 나서 '기름을넣자!  차 서기전에' 그랬더니 안대하고 손을 풀어 주더라구요. 그때부터 대화를 했지요. 참 불쌍한 애들이었어요. 

고아원에서 살다가 감방에서 만난 애들 둘이 강도가 된거예요. 차안에서 밤새 얘기하다가 같이 울었어요. 서로 불쌍해서… 그때 돈 벌 때니까 돈을 줬어요. 그리고 헤어질 때 얼굴 좀 보자 했더니 복면을 벗고 '미안해요 누나!' 그러면서 눈물을 글썽이더라구요. 차에 칼을 두고 가길래 '네 물건은 챙겨가라!' 했지요.''

그렇게 살지 않기로 약속하고 헤어진 그들은 그 후에 어찌 사는지 모른다. 딱 한번, 전화가 왔었다. 울먹이는 목소리로 ''정말 미안하다. 잘 살겠다.''고 말했단다. 그 후에 청담동 3인조 강도가 체포됐다는 뉴스를 보긴 했지만 그들이 아니길 빌었다.

20대에 독립브랜드를 만들었고, 30대 초반에 직영 패션샵에서 하루 매출 1억원 이상을 찍었으니, 꽤 큰 돈을 벌었다. 그런 이유로 그녀는 서투른 강도들의 표적이 되었던거다.

유지영 디자이너.

''좀 놀라긴 했지만 두렵지 않았어요. '하나님 왜 이러셔요. 나보고 어찌 하라고? 물었어요. 그리고 그들이  원하는게 뭔지 알았고, 내가 그걸 줄 수 있었으니 맘이 놓였지요. 적지 않은 돈이지만 빼앗긴게 아니라 진심으로 그들이 잘 살길 바라는 마음으로 주었으니까 당연히 신고도 안했고요.'' 

패션디자이너 유지영은 겁없는 여자다. 어린 나이에 세상을 지배하는 방법을 알았다.

그의 무기는 '딱보면 아는' 거였다. 처음엔 매장의 디스플레이를 시작했다가 디스플레이 컨셉을 위한 옷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들이 소비자와 교감하며 스스로 브랜드가 되어버렸다.

'noo'라는 브랜드를 세상에 던졌다. ''누구세요?''라는 물음이었다. 'Who'가 아니라  'noo'라고 했다. 세상 사람들이 용케 알아듣고 답을 해왔다. 후속 브랜드 '점'도 폭발적인 신장세를 이어갔다.

내가 다른 '점'이 있다는 걸 주장한 브랜드다. 예쁜 옷의 상식을 깬 '누'와 '점', '지지배'는 점점 커졌다. 그렇게 유지영은 업계에서 돈 잘버는 디자이너가 되어갔다. 

유지영 디자이너

1998년도엔 밀리오레에 디자이너들의 산실인 'VMD'의 기획데스크를 맡아 새로운 개념의  '디자이너 전성시대'를 열었다. 이어 청담동에 샵을 오픈하고 패션위크에 공식데뷔를 했다. 데뷔하자마자 홍콩, 도쿄에 초청브랜드가 되어 샵과 지사를 설립했다. 얼떨떨한 수직상승이었다.

''하고싶은 대로 만들면 정신없이 팔리는 바람에 터무니없는 확신에 빠지게 되더라구요. 원하는대로 만들었지요. 그리고 원하는 만큼 팔았어요. 국내 생산이 어려워서 중국 '광조우'에 생산라인을 만들고 광조우에서 상주하며 작업 했어요.''

그러던 어느날, 한국에서 찾아 온 감당못할 악연과 조우했다. 유지영은 사업도 작업도 포기하고 모든 일들을 중단하고 귀국했다.

''내가 아무것도 없고, 어떤 것에도 연연하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면 그 악연이 끝날 줄 알았어요.'' 그리고 그녀는 스스로 망했다. 200억원 정도의 자산을 스스로 내던지 듯 청산하며 쓰라린 30대를 보냈다.

칼을 겨눈 강도 조차도 두려워 하지 않던 그녀가 자기의 모든것을 포기하면서까지 탈출 하고팠던 그 악연의 실체는 '사람' 이었다. 

유지영 디자이너.

''내가 소중히 생각하는 모든 것들을 욕되게 하는 걸 참을 수 없었고, 그 것으로부터의 해방과 자유를 위해 그동안 얻은 것들을 다 버렸지요.''

그리고 진공관 속 삶처럼 지내던  어느 날, 삭막하던 가로수길 한 가운데 편히 밥 먹을 집을 마련했다. 은행 빚을 내서 마련한  '그랜드마더'는 가로수 길의 랜드마크가 됐다.

"제가 참 용감하거든요. 그리고 제가 손 대면 돈이 되더라구요. '그랜드마더'도 물론 그랬지요. 헌데, 큰 돈이 고이는 건 저 밑바닥이더라구요. 물만 밑으로 흐르는 줄 알았는데 돈은 더 밑에서 흐른다는 걸 옛날엔 몰랐어요.''

'그랜드마더' 가로수길 시대를 혼자 끝내고 나서 42살 자연인이 된 유지영은 생애 최초로 방문한 은행창구에 서서 펑펑 울었다.

당황한 창구직원이 놀라 뛰쳐 나오자 소액의 현금을 손에 움켜쥔 그녀는 코메디영화의 배우처럼 대사를 읊었다.

"내가 혼자 은행에 와서 돈을 찾았잖아요. 난 이제 뭐든지 할 수 있어요.'' 더 당황한 은행직원은 그녀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영문 모르고 곁을 지켰다.

모든 일들을 비서가 처리했고, 특히 은행 일은 그녀가 감당 못할 고난도 업무라고 알던 그녀의 은행 첫 경험은 눈물나도록 특별한 일이었다.

가로수길에서 시작한 '그랜드마더' 시대는 거하고 청담동 '그랜드마더'와 예술의 전당 '그랜드마더'를 거쳐 2016년에 '그랜드마더' 시대는 종막을 고했다.

''그만할 때가 된거지요. '디자이너 유지영'으로 다시 시작할 때가 됐더라구요. 그래서 더 용감해졌지요. 2016년, 패션위크에 디자이너 유지영으로 다시 섰습니다.''

유지영 디자이너.

그녀의 '디자이너'라는 발음은 묘하게도  '테러리스트'라는 느낌처럼 강렬하게 들려왔다. 그녀는 태생적으로 초식동물이 아닌 탓이다. 맹수의 눈빛으로 세상을 보고, 풀 뜯어 먹는 소리를 절대로 내지 않는다. 당연히 물 뜯어 먹는 소리를 내는 동물을 상종치 않는다.

다시 패션디자이너 유지영으로 살기 시작한 2016년 이후부터 그녀는 세상을 지배하는 패션의 권력을 되찾기 위해 대중과 대화를 시도했다.

그러나 그녀의 대화방식은 보통 디자이너처럼 환타스틱하거나 엘레강스하거나 스윗하지않다. 오히려 선동적이거나 지배적이거나 도발적이다.

'디자이너 유지영'으로 말할 때, 그녀의 눈동자는 맹수의 눈동자처럼 흔들림이 없다. 히틀러의 눈빛이 그랬다. 흔들리는 독일인들에게 '위대한 게르만!'을 외칠 때. 그리고 히틀러는 나치패션을 만들어 대중선동과 최면에 성공했다. 

그의 연설이 10만명을 설득했다면 나치의 패션은 1000만명에게 '위대한 게르만'의 자존감을 심어 주었다. 패션은 때때로 대중최면과 선동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 디자이너 유지영은 그런 패션의 대중지배력을 아는 영악한 디자이너다. 

코로나19의 폭격으로 세계적인 '두바이패션쇼'가 취소될 위기에 있던 3월12일. 그녀는 거침없이 두바이행 비행기를 탔다. 전사처럼 단련시킨 시니어 모델들과 함께.

''우리가 참여한 두바이패션쇼는 뉴욕, 런던, 파리, 밀라노를 잇는 세계적인 패션쇼였는데… 결국, 코로나19사태로 메인 오픈이 잠정연기 됐지만, 저희는 현지 도착한 디자이너팀들과 예정된 행사를 성공적으로 끝내고 돌아 왔습니다.''

유지영 디자이너.

''메인 오픈이 아니어서 아쉬웠지만 함께 한 시니어 모델들이 세계적인 전문가의 호평을 받으며 런웨이를 걸을 때 가슴 뭉클 했지요. '런웨이'는 말 그대로 '런웨이' 거든요.'' '런웨이'에서 제 속도를 내면 반드시 떠오르게 된다. 활주로의 비행기처럼.

디자이너 유지영! 그녀는 지금 이 순간, 지구 중력을 뿌리치고 이륙하는 비행기 조종사처럼 런웨이에 시선을 집중하고 있다. 그녀의 가슴 속 제트엔진이 자꾸만 울컥거리기때문이다. 유지영은 히틀러의 눈빛을 지닌 디자이너다.

유지영 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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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日 여행객 'K-쌀' 사간다 [세종=뉴스핌] 이정아 기자 = 일본 여행객이 한국을 방문, 한국 쌀을 직접 구매해 들고 나가는 사례가 급증하고 있다. 일본 내 쌀값이 고공행진을 이어가는 가운데 '밥맛 좋은 한국 쌀'이 대체제로 급부상하면서 벌어지는 현상이다. 3일 <뉴스핌>이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올해 1월부터 6월까지 상반기 동안 일본 여행객이 한국에서 직접 구매해 일본으로 들고 간 국산 쌀은 3만3694kg로 집계됐다. 일본은 지난 2018년부터 휴대식물 반출 시 수출국 검역증을 의무화한 나라로, 병해충과 기생식물 등 식물위생 문제에 매우 엄격하다. 특히 쌀처럼 가공되지 않은 곡류는 검역 과정이 매우 까다롭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여행객들의 한국산 쌀 열풍은 지속됐다. 지난해 한 해 동안 일본 여행객이 반출한 국산 쌀은 1310kg에 불과했지만, 올해는 상반기에만 무려 25배 이상 급증했다. 같은 기간(2024년 1~6월)으로 비교하면 작년 106kg에서 올해 3만3694kg로 약 318배 증가한 셈이다. 농식품부 관계자는 "일본 여행객들의 '쌀 쇼핑'이 열풍을 불면서 관련 문의가 급증했다"며 "한국쌀이 일본쌀에 비해 맛과 품질이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인식이 생기면서 반출되는 양도 많아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쌀을 화물로 탁송하는 사례도 동반 상승했다. 올해 상반기 기준 화물검역을 통해 일본으로 수출된 국산 쌀은 43만1020kg에 달한다. 지난해 화물 검역 실적이 1.2kg에 그쳤던 것과 비교하면 폭증 상태다. 업계에서는 이번 흐름이 국산 쌀에 대한 일시적 특수로 끝나지 않고 국내에서 정체된 쌀 소비의 새로운 돌파구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임정빈 서울대 농경제학과 교수는 "일본에서 쌀 가격이 두 배 이상 올랐으니 한국에 와서라도 쌀을 구매하는 여행객이 늘어난 것"이라고 짚었다. 이어 "다만 일본의 쌀 관세율이 매우 높기 때문에 한국 쌀의 가격만 보지는 않았을 것"이라며 "국산 쌀의 품질이 높기 때문에 이 부분에서도 합격점이 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영종도=뉴스핌] 윤창빈 기자 = 11일 오전 인천국제공항 제1터미널에 중국발 여행객들이 입국하고 있다. 2023.03.11 pangbin@newspim.com 정부 역시 이같은 수요에 대응해 일본 관광객을 대상으로 검역제도 안내·홍보에 나서기로 했다. 현재는 농림축산검역본부를 통한 사전신청, 수출검역, 식물검역증 발급, 일본 통관까지 최소 3단계 이상이 요구된다. 다만 한국 쌀을 일본으로 반출할 때 한국에서 식물검역증을 발급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일본 관광객이 일본에 돌아가 쌀을 폐기하는 일이 생기면서 홍보의 필요성이 대두됐다. 농식품부 고위 관계자는 "지난달 오사카 엑스포 현장 방문을 계기로 일본 농림수산성과 예방할 기회가 주어졌는데 그 자리에서 쌀 검역 문제가 논의됐다"며 "한국 정부는 일본 여행객이 애써 한국 쌀을 구매한 뒤 일본으로 돌아가 폐기하는 일이 없도록 제도 홍보에 만전을 기하겠다"고 전했다. plum@newspim.com 2025-07-03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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