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핌=서영준 기자] 정부가 내수시장 활성화를 통한 지속적인 성장을 위해 소득주도의 정책을 추진할 방침이다. 특히 과거 수출주도의 성장정책에서 벗어나 기업의 이익을 사회 전반에 고르게 재분배시켜 가계↔기업↔정부 등 경제의 선순환 고리가 약화된 구조적 문제 해결에 집중할 계획이다.
이를 위해 정부가 주목하고 있는 것이 기업의 사내유보금. 정부는 기업의 투자유도를 위해 법인세 인하 등 각종 정책을 동원했지만 정작 투자보다는 기업 사내유보금만 늘었다고 판단하고 있다. 이에 따라 정부는 향후 기업의 경영활동으로 발생한 당기순익을 인건비, 투자, 배당 등에 사용할 수 있도록 유도하고 내수경기 살리기에 총력을 다 할 예정이다.
하지만 정작 기업들은 불안한 경영여건 속에서 내우외환에 시달리고 있는 실정이다. 때문에 기업 입장에서는 불확실성이 높은 투자나 배당으로 인해 재무건전성 악화를 스스로 재촉할 여유가 없다. 새로운 경제팀의 경제정책방향에 쌍수를 들고 환영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내우외환 시달리는 기업들
올해 국내 기업들은 그 어느 때보다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 원화 강세에 따른 원달러 환율 하락은 기업의 수익성 악화라는 결과를 만들어 냈다. 내부적으로는 통상임금 문제 등 언제든 기업을 압박할 수 있는 난제들이 산적해 있다.
실제 삼성전자는 지난 2분기 잠정 영업이익이 7조 2000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24.45% 감소했다고 밝힌 바 있다. 삼성전자의 실적 악화는 스마트폰 판매 부진에 따른 것으로 중저가 제품을 앞세운 중국 업체들의 약진이 영향을 미쳤다.
이에 따라 삼성전자는 내부 분위기 쇄신을 위해 본사 인력의 15%에 달하는 직원들을 현장으로 재배치하고 임원 워크숍을 열어 해법을 모색하는 등 분주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현대차그룹 역시 환율 영향으로 올 상반기 고전하는 모습을 보였다. 현대차는 올 상반기 영업이익이 전년 동기 대비 5.8% 감소한 4조 256억 원을 기록했다. 기아차도 같은 기간 영업이익이 1조 5054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17.8% 줄었다.
현대·기아차의 영업이익 하락은 원화절상 및 러시아 루블화 하락에 따른 수익성 하락 등의 영향으로 매출원가율이 증가한 데 따른 것이다.
내부적으로는 통상임금 문제가 발목을 잡고 있다. 노동계 최대 현안으로 꼽히는 통상임금 문제는 현대차 노사의 합의 내용에 따라 산업계에 미치는 파장이 클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최태원 회장의 부재로 SK그룹도 위기를 맞고 있다. 그룹의 주력계열사인 SK이노베이션은 지난 2분기 영업손실 502억 4700만원을 기록하며 적자전환하는 모습을 보였다.
상황은 여타 계열사들도 비슷할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이번주 실적 발표를 앞둔 SK네트웍스, SK텔레콤 등 주요 계열사들 또한 영업이익이 시장 기대치를 밑돌거나 정체 현상을 보일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그나마 SK하이닉스가 분기 영업이익 1조원을 넘어서면서 SK그룹의 체면을 세우고 있는 정도다.
SK그룹은 수펙스추구협의회를 중심으로 위기상황 타개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지난달에는 김창근 수펙스추구협의회 의장을 비롯한 주요 관계사 최고경영자(CEO) 30여명이 긴급 워크숍을 갖고 위기극복 의지를 다지기도 했다.
◆곳간 문 꽁꽁…현금성 자산 증가
경영환경의 불확실성이 높아지면서 기업들은 곳간 문을 여는 데 주저하고 있다. 이에 따라 최근 10대 그룹의 현금성 자산은 늘고 있는 추세다.
기업경영성과 평가기관인 CEO스코어에 따르면 10대 그룹 76개 상장사의 올 1분기 현금성 자산은 148조 5200억원으로 5년 사이 56%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현금이 총자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같은 기간 11.9%에서 13.6%로 높아졌으며 1분기 말 사내유보금 516조원에 대비 현금성 자산은 29% 수준을 기록했다.
10대 그룹 중 현금이 가장 많은 곳은 삼성으로 66조원을 기록했으며, 이 가운데 삼성전자의 현금성 자산이 59조 4000억원으로 90%를 차지했다. 현대차그룹의 현금성 자산도 42조 8000억원으로 조사됐다.
10대 그룹의 현금성 자산이 이처럼 높아지는 데는 금융위기 이후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비한 예비적 성격이 크다. 이러한 경향은 국제적인 추세에서도 확인 할 수 있다.
미국의 경우 기업들의 현금성 자산이 1980년 10.5%에서 2006년 23.2%로 두배 이상 증가했으며 아시아 국가들도 1996년 6.7%에서 2006년 12.1%로 외환위기 전후 두배 가까이 증가했다.
2013년 기준 상장기업 비교에서도 우리나라 상장기업 현금성 자산의 총자산대비 비율은 미국, 일본, 대만, 유럽연합에 비해 낮게 나타나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배당을 강화한다고 해서 현금성 자산이 투자로 이어질 지도 미지수다.
실제 미국의 마이크로소프트는 지난 2004년 현금배당계획을 발표한 이후 현재까지 당초 계획보다 많은 2200억달러를 배당했으나 현금성 자산은 2004년 606억달러에서 2013년 768억달러로 오히려 증가했다.
애플 또한 올해 4월 배당정책을 발표했으나 마이크로소프트와 마찬가지로 현금성 자산의 증가를 막을 수 없을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김윤경 한국경제연구원 부연구위원은 "사내유보금의 과세를 통해 배당을 증가시킬 경우에도 국내 투자 증가의 목적에 오히려 역행할 가능성이 있다"며 "주요 상장사의 외국인 투자비중이 높은 상황에서 배당압력이 클수록 국부 유출의 우려도 증가된다"고 설명했다.
이어 "사내유보금 과세와 같은 배당을 증진시키는 정책적 노력은 현금성 자산을 투자와 고용에 사용하게 하는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규제 개혁 한 목소리
일자리 창출과 투자를 주문하는 정부에 기업이 바라는 점은 불필요한 규제를 철폐하는 등 속도감 있는 정책추진이다. 특히 지난 3월 박근혜 대통령 주재로 이뤄진 규제 개혁 끝장 토론 이후에도 지지부진한 규제 개혁에 대한 기대감이 높은 상황이다.
이를 위해 지난 22일 최경환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과 만난 자리에서도 재계는 규제 개혁과 관련해 한 목소리를 냈다.
박용만 대한상의 회장은 "우리 경제가 재도약하느냐 쇠락하느냐의 골든 타임은 2년 밖에 안 남았다"며 "사전 규제를 없애고 사후 규제로 바꾸는 등 구조개혁의 강도를 높여 달라"고 말했다.
한덕수 무역협회 회장은 "무역업계는 경쟁력 있는 새로운 상품과 서비스를 만들어내고 새로운 시장을 개척해야 할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낀다"며 "무역업계의 경쟁력 강화를 위한 규제 개혁에 신경 써달라"고 주문했다.
김기문 중소기업중앙회장도 이날 "경제가 어려우면 가장 고통받는 게 중소기업, 소상공인"이라며 "내수활성화와 소비심리 회복에 적극적으로 노력해 달라"고 설명했다.
김영배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 직무대행은 역시 "우리 기업이 외부에 눈을 돌리지 않고 국내 투자를 활성화할 수 있는 분위기가 근로자에게도 좋고 내수 진작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재계가 이같이 규제 개혁과 투자 활성화를 위한 여건 마련에 목소리를 높이는 데는 궁극적으로 기업의 수익창출이 가계는 물론 사회 전반에 부의 재분배를 이끌어 낼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김 부연구위원은 "사내유보금에 대한 과세는 기업의 투자나 경제 선순환과 무관한 과세"라며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수익 창출을 전제로 이뤄져야 하며 사회적 책임을 과세로 강제적으로 부여해 기업의 수익구조를 악화시키는 것은 오히려 사회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말했다.
오문성 한양여대 교수는 "사내유보금 과세제도는 경기를 어떻게든 활성화시키겠다는 정부의 강력한 의지의 표현"이라며 "임금이나 배당을 정부의 시책에 맞게 더 지급하는 기업에 대해 조세 측면의 인센티브를 주는 것이 사내유보에 대해 과세하는 것보다 부작용도 적고 정책목적을 달성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뉴스핌 Newspim] 서영준 기자 (wind0901@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