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신화/뉴시스> |
피셔 총재는 벤 버냉키 연준 의장과 마리오 드라기 유럽중앙은행(ECB) 총재를 가르친 스승으로, 중앙은행장들 사이에서는 '전설'로 통하는 인물로 알려졌다.
지난 11일 월스트리트저널(WSJ)을 비롯한 주요 외신들은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피셔 전 총재에게 부의장직을 제안했고 피셔 역시 이를 수락했다는 내용을 보도한 바 있다.
월가를 비롯해 미국 주요 언론들은 피셔가 연준에 합류할 것이라는 관측에 자넷 옐런 연준 의장 지명자와 함께 '드림팀'이 구성될 것이라며 기대감을 드러내고 있다.
스탠리 피셔는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경제학 박사 출신으로 '신 케인지언'들의 대부 중 한 명으로 꼽히고 있다. 그는 지난 2009년 세상을 떠난 미국 최초의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사무엘슨의 제자다.
그는 물가 안정을 중요시하는 매파로 분류되고 있지만 그보다는 매파와 비둘기파의 경계를 오가는 실용적인 통화정책을 선호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그는 지난 1990~1994년 MIT 교수 재임 당시 벤 버냉키의 논문을 지도했한 것으로 유명하다. 당시 마리오 드라기 ECB 총재와 래리 서머스 전 미국 재무장관, 그레고리 맨큐 전 백악관 경제자문도 피셔의 수업을 들었다.
특히 버냉키 의장은 피셔를 자신의 중요한 멘토 중 한 명이라고 평가하는 등 그의 영향을 많이 받은 인물 중 하나다.
그래고리 맨큐 하버드대학교 교수도 피셔 교수에 대해 "열린 사고를 가진 조언자였다"면서 "그는 학생들에게 넑게 생각과 함께 동의할 수 없는 견해에 대해서도 진취적인 견해를 가지도록 조언했다"고 평가한 바 있다.
피셔는 이후 1994~2001년까지 국제통화기금(IMF) 부총재를 역임하며 신흥시장의 외환위기에 맞서 금융시장 안정을 위해 노력했다.
당시 IMF는 1994년 멕시코 위기와 1998년 아시아 외환위기라는 두 악재에 직면해 가까스로 위기 진화에는 성공했지만 상당한 비용을 치러야 했다. 하지만 핌코의 엘 에리언 최고경영자는 당시 상황을 회상하면서 "피셔의 외교적 능력이 발휘되지 않았다면 당시 위기 상황은 더 악화됐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IMF를 떠난 뒤 피셔는 2002~2005년까지 씨티그룹 부회장으로 역임하다 이스라엘의 요청에 따라 외국인 최초로 중앙은행 총재직을 맡았다.
이스라엘 총재로 역임하면서 피셔의 능력이 세삼 주목을 받았다.
이스라엘은 2008년 외환위기가 시작되 이후 가장 먼저 기준금리를 인하하면서 대응에 나섰으며 시간이 흐른 뒤 위기가 안정화될 조짐을 보이자 역시 가장 먼저 금리 인상을 단행한 바 있다.
더불어 이스라엘 통화인 셰켈의 절상을 막기위해 외화시장에 개입하는 등 경제의 지속 성장을 위해 선제적으로 움직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올해 초 머빈 킹 전 영란은행(BOE) 총재는 "금융위기 동안 이스라엘은 매년 성장세를 기록한 몇 안되는 선진국 중 하나였다는 점은 피셔의 경제 운용 능력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평가했다.
[뉴스핌 Newspim] 우동환 기자 (redwax@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