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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서원, 세계유산 등재③] 김병일 도산서원장 특별대담-(2)

“선비정신… 의병, 실학, 독립운동으로 이어져”
“대내외적 대변환기… 내부에서 해결 실마리 찾길", "상대 인정해야”

  • 기사입력 : 2019년07월15일 09:21
  • 최종수정 : 2019년07월15일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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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스핌] 황남준 논설실장 = 노무현 정부시절 기획예산처 장관을 지내면서 나라살림살이를 책임졌던 김병일 도산서원장 겸 선비문화수련원 이사장.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 선정을 한달여 앞두고 안동 도산서원에서 그를 만났다. 김원장은 지난 2008년이후 11년 넘게 선비문화수련원 이사장을 맡고 있다.

 - 최근 김 원장은 퇴계로부터 비롯된 선비정신에 대해 자주 언급했다. 영국의 신사도, 미국 개척자 정신, 일본의 사무라이 정신이 이들 나라를 선진국으로 이끌었다고 했다. 우리나라 선비정신은 어떤 것인가.

▲ 선진국이 되려면 국민의 정신이 있어야 한다. 선진국의 지도층은 나름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해 국민을 단합시키고 통합시켜 나라를 발전시켰다. 우리가 지금까지의 패스트 팔로워(fast follower)에서 벗어나 선진국처럼 퍼스트 무버(first mover)로 되려면 반드시 국민정신이 있어야 한다.

선진국의 지도층은 전쟁이 나면 앞장서서 전쟁터에 나갔고 번 것은 같이 나눠 가졌다. 그러나 이렇게 장점만 있지 않았다. 그들은 다른 나라들을 침략하는 길을 걸었다.

영국은 제국주의로 나갔다. 아프리카에서 사람을 잡아서 미국에 팔아 돈을 벌었다. 중국에 아편을 팔았다. 미국은 인디안을 학살하고 대륙의 주인이 됐다. 일본은 동북아, 동남아를 침략해 약탈했다.

우리에게는 이웃을 배려하고 존중했던 자랑스러운 선비정신이 있다. 옛날 양반문화의 퇴영적인 것은 버리고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가슴 뭉쿨하게 하는 희생정신을 되살려야 한다.

우리 선비들은 나라가 어려울 때 앞장섰을 뿐만 아니라 자기책임하에 자식과 이웃들까지 민병으로 동원하고 무기를 들고 죽을 때 까지 싸웠다. 임진왜란과 조선후기의 의병활동, 일제하 독립운동에 올곧은 선비들이 앞장서 나갔다.

[안동=뉴스핌] 이한결 기자 = 김병일 도산서원 선비문화수련원 이사장이 안동 선비문화수련원에서 경주 최부자집 나눔과 배려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alwaysame@newspim.com

 

◆ 최부자집 나눔과 배려의 경영, 퇴계 선생의 선비정신에 뿌리…‘조선판 노블레스 오블리주’

- 경주 최부자 집 이야기는 아직까지 후대에 감동을 주고 있다. 최부자 집의 이웃을 향한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어떤 것 인가.

▲ 경주 최부자는 서양의 부자들도 상상조차 못할 모범적인 행동을 했다.

부자가 3대 가기도 어려운데 최부자집은 3백년 이상 부자로 살면서 어려운 이웃과 함께 했다. 결코 욕을 먹은 일이 없다. 창업주가 3대가 지나면 생각이 달라질 수 있는데 최부자는 10대이상 지속하면서도 존경을 받았다.

일제시대때 집안재산의 절반은 독립자금으로 내놓고 광복이후 나머지 절반도 육영자금으로 내놓았다. 그리고도 10대를 넘어 존경받는 영속경영을 했다.

최부자집에는 6훈이 있었다.

첫째, 만석이상 농사 짓지 말라(베풀고도 농작물이 창고에 남으면 소작료를 깍아 주었다.)

둘째, 벼슬은 진사(進士)이상 하지 말라(정경유착, 당쟁에 휘말리지 말라, 그러나 무식한 부자는 되지 말라.)

셋째, 며느리는 시집와서 3년동안 무명옷을 입어라.

넷째, 흉년에 땅 사지 말라.

다섯째, 사방 백리에 굶는 사람이 없게 하라.

여섯째, 과객을 후하게 하라(옛날에는 경주에 식당 여관이 없었다. 자고 먹을 데가 부잣집 밖에 없다,)

최부자집 가훈은 ‘자기 절제’가 절반이고 ‘상대방 배려’, 즉 나눔이 나머지 절반이었다. 최부자집 가계도 퇴계의 학맥에 속한다, 최부자집 후손들은 퇴계 제자나 퇴계 집안인 안동쪽 사람하고 결혼을 많이 했다.

경주 옥산서원은 중종때의 성리학자 회재 이언적(李彦迪,1491~1553) 선생을 기리고자 1574년 세워졌다. 퇴계 선생과 한 시대에 성리학을 같이 공부하고 깊은 왕래가 있었다. 옥산서원 앞 세심대에는 퇴계 선생의 친필 휘호가 새겨져 있다. 그의 학문 핵심 주리설은 후에 퇴계 선생에게 이어져 주리설의 선구가 되게 했다.

 

◆ 선비정신, 개인 이익보다 의로움 앞세워…충무공, 의병, 항일운동은 선비정신의 발로

-선비 정신이란 구체적으로 어떻게 표현할 수 있나

▲ 자기의 인격 수양 후에 다른 사람을 잘되게 하는데 요체가 있다.

인격 수양후 조정에 나가 벼슬하던지 경제 활동을 하면서 최부자처럼 더불어 사는 삶을 실천했다. 그리고 국가가 위기에 처해 있을 때 목숨을 바치기도 했다. 의로움이 개인의 이익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몸소 실천했다.

성리학이 가장 활발했던 ‘사림의 시대’에 임진왜란이 발생했다. 그때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바다에 계셨지만 육지에서 크게 전세를 뒤바꾼 의병활동이 대표적인 선비정신의 발현이다. 무기와 병력수를 계산하면 절대 나설 수 없었지만 이해나 승패보다는 의를 중요하게 여겨 목숨을 초개같이 버렸다.

조선말기 의병활동 가장 먼저 일어난 곳이 안동·예안 지역이다. 안동·예안지역은 처절하게 의병활동이 일어났지만 여기에 그치지 않고 한일 합방으로 나라가 망한 뒤 자살한 사람 전국 70명중 안동지역이 10명에 이를 정도로 항일정신이 투철했다.

안동지역 사람들은 나라가 망한뒤 재산을 팔고 가족 데리고 만주행을 택했다, 임청각 이상룡(李相龍·1858~1932)선생이 대표적이다. 선생은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냈고 그 아들, 손자까지 모두 만주에서 항일운동을 했다. 이 선생의 4대 증손 이항증(80)은 고아원에서 자라야 했다.

남아있는 사람은 독립자금을 대주었다. 임진왜란때 의병을 일으킨 학봉 김성일 선생의 종손은 일제시대 독립운동 자금을 몰래 대주기 위해 파락호 역할을 한 것은 아직도 회자되고 있다.

안동지역에는 독립유공자가 360명에 달한다. 전국 1만5000명이 있으니 한 시군 평균 40명 정도이다. 그 정도로 안동지역에는 독립유공자가 많으며 대부분 퇴계 자손 또는 학맥을 잇고 있다. 퇴계 선생의 가르침이 450여년 동안 깊고 넓게 울려 펴지고 있다.

 

◆ 퇴계 도인법…“마음이 몸을 이끈다”, “그러나 몸이 발라야 정신이 바르다”

- 퇴계 선생은 학문과 마음 수련시 몸 수련을 병행할 정도로 몸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퇴계선생이 도인법을 수련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마음과 몸의 관계를 어떻게 봤나

▲ 퇴계 선생은 젊어서 너무 열심히 공부하다 몸이 약해져 따라가지 못했다. 건강을 간절히 생각했다.

퇴계 선생보다 100여년전 중국 명나라를 세운 태조 주원장의 아들 주권은 도인술에 심취해 ‘활인심방’이라는 저술을 남겼다. 퇴계 선생은 그 책을 구해 자신에 맞게 편저를 했다.

8가지 동작과 소리까지 매일 수련하셨다. 퇴계 선생 가문에서는 지금까지 활인심방을 열심히 수련한다.

현재 종손의 부친(15대 종손)은 101세까지 장수하다 돌아가셨고 종손은 현재 88세로 아침 저녁으로 하루 2시간씩 수련해 건강을 유지하고 있다.

퇴계 선생은 몸과 마음의 관계를 “마음이 몸을 주재하고(心者 一身之主宰, 심자일신지주재), “경이 마음을 주재한다(敬者 一心之主宰, 경자일심지주재)”고 하셨다.

다시말해 마음이 몸을 이끌고 마음은 경이 이끈다고 표현하셨다.

또 선생은 정제엄숙(整齊嚴肅)이라고 하셨다, 몸이 발라야 정신이 바르다는 뜻이다. 몸을 수련하는 이유다.

병은 치료하는 것 보다는 예방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병이 나면 의사가 고치지만 성인은 병을 예방하게 한다. 동의보감의 3분의 1은 병을 고치는 처방이고 나머지 3분의2는 병의 예방법에 관한 것이다.

예방중에서도 육체적 예방 3분의 1이고 3분의 2는 마음가짐이다. 퇴계 선생은 중화탕(中和湯)이라는 약 제조법을 제시했는데 이는 십전대보탕처럼 물리적인 약제처방이 아니라 마음가짐에 관한 것이다. “사악한 생각을 하지마라”(思無邪, 사무사), “질투하지 말라”(莫嫉妬,막질투) 등 서른 가지 생각을 가지고 살면 병이 오지 않는다고 가르치셨다.

 

◆ 대내외적 대변환기… “내부에서 해결 실마리 찾아야, 상대를 인정해야”

- 요즘 대한민국은 정치 사회 문화적으로 혼란스럽다. 세계는 4차산업혁명, 미·중 패권경쟁 등 대전환기를 맞고 있다. 정치권은 민생 및 경제 해결 능력이 없고 정쟁에 여념이 없다. 노노갈등, 빈부격차 등 사회갈등도 격화되고 있다. 선비정신을 가르치는 입장에서 세상의 현안에 대해 묻는다면

▲ 어느 때보다 어려운 시기에 있다. 그 이유는 외부적인 것도 있지만 내부의 판단이나 행동으로 인한 것도 있다. 내·외부 요인이 상호작용해서 어려운 일이 나타난다. 외생적 요인보다 내재적인 요인을 바로 잡으면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수많은 갈등 이를테면 빈부 사상 지역 갈등에서 젠더 세대 갈등이 생기고 있다. 이런 갈등은 상대를 인정하지 않고 자기 입장만 강조하다보니 더 간극이 벌어지고 있다.

그 중 세대간 갈등이 가장 심각하다. 위에 있는 사람이 사랑으로 배려로 다가가면 아랫사람은 따르고 존경한다. 윗사람이 그러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래서는 미래가 없다. 내가 소중한 만큼 상대방도 소중히 여기는 각성이 위에서부터 일어나야 한다.

 

[안동=뉴스핌] 이한결 기자 = 도산서원 도산서당에 현판이 걸려있다. 퇴계 선생이 직접 쓴 글씨로 소박하기 이를데 없다. alwaysame@newspim.com

◆ 퇴계 큰 가르침은 올바른 ‘퇴’(退)…‘퇴계 귀향 순례길’은 퇴를 실천하는 방편되길

- 김 원장은 지난 4월 퇴계 선생의 마지막 귀향길을 걸었다. 450년전 퇴계 선생이  벼슬에서 물러나 마지막으로 고향 도산서원으로 돌아간 길이다. ‘퇴계 귀향 순례길’이라는 이름을 달기도 한다. 이 길을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처럼 퇴계 선생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장으로 삼자는 의견도 있는데?

▲ 올해가 퇴계 선생 마지막 귀향 450년째 되는 해이다. 귀향길을 재현하면 퇴계 선생의 가르침을 이 시대에 널리 알리는데 큰 효과가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퇴계 선생의 가르침의 가장 큰 특징은 나아갈 ‘진’(進)이 아니고 올바른 ‘퇴’(退)이다. 당시 ‘진’이 너무 팽배한 사회에서 퇴계 선생은 ‘퇴’를 택했다. 그래서 4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엄청난 울림을 주고 있다. ‘퇴’ 중에서도 마지막 물러남이 가장 큰 의미가 있다

단순한 물러남이 아니다. 돌아가실때까지 1년9개월동안 후학과 주변을 위해 성의껏 헌신하셨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힘든 시절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노년에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대해 퇴계 선생이 주는 메시지에는 큰 의미가 있다.

마지막 귀향길 메시지는 말이나 글이 아니라 실천이다. 귀향길은 13일 걸렸고 8백리 길을 학자와 후손, 일반 시민들이 함께 움직였다. 하루에 70~80리길 걸었다. 도중 강연회, 시조낭송회, 노래공연 등도 매일 했다. 많은 사람이 퇴계 선생을 보다 가깝게 생각하고 가슴깊이 간직할 것이라 생각했다. 참 공부는 경을 긍극적으로 실천하는 것이다. 그것이 참다운 구도의 길이다.

wnj777@newspi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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