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골공원 장기판 두고 구청·어르신 '갈등'
어르신 "오갈 곳 없는 노인들 인생 낙 뺏겨" 불만
구청 "장기판에 담배꽁초, 술병까지...민원 많아"
[서울=뉴스핌] 노해철 기자 = 구청이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 인근에서 벌어지는 ‘대국’(大局)에 대한 단속에 나서면서 어르신과 갈등을 빚고 있다.
구청은 도로 환경 등을 이유로 장기판을 강제 수거하는 반면, 어르신은 황혼기 유일한 재미를 잃을까 우려하고 있다.
20일 탑골공원 후문 가로수에 '자진정비 안내문'이 붙어있다. 장기판이나 의자 등을 정리하지 않으면 구청에서 강제수거할 것이라는 내용이다. [사진=노해철 기자] 2018.11.20 sun90@newspim.com |
20일 오전 탑골공원 후문. 장기를 두고 있는 어르신들 사이로 ‘자진 정비 안내문’이 눈에 띄었다. 안내문은 ‘도시미관 저해’와 ‘통행 불편’을 초래한 장기판과 의자를 어르신 스스로 정리하라는 내용이다. 그렇지 않으면 도로법을 근거로 강제 수거하겠다는 것이다.
◆ 어르신 “내 인생의 ‘낙’인데”...구청 “손 놓고 있기 어려워”
구청의 조치에 어르신 불만은 커지고 있다. 일거리 없고, 주머니 사정이 어려운 노인들의 공간만 뺏기고 있다는 것이다.
종로구 쪽방에서 혼자 거주하는 공이식(69) 할아버지는 “여기 찾는 노인네 대부분이 나와 비슷한 처지”라며 “평소 여기에 나와 바람 쐬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게 유일한 낙인데, 구청에서는 치우라고만 하니 답답하다”고 털어놨다.
서울 송파구에서 매일 탑골공원을 찾는 김상기(73) 할아버지도 마찬가지다. 그는 “노인 복지가 따로 있냐”며 “오갈 곳 없는 노인들을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쫓아내기 바쁘다”며 불만을 내비쳤다.
20일 아침 일찌감치 탑골공원을 찾은 어르신 한 분이 간이의자에 앉아 신문을 읽고 있다/ [사진=노해철 기자] 2019.11.20 sun90@newspim.com |
어르신 불만에도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다는 게 구청 입장이다. 구청은 어르신들이 탑골공원과 종로공원에서 머무는 동안 그 주변을 더럽힌다고 보고 있다. 이에 따라 구청 건설관리과는 보름이나 일주일 주기로 공원 장기판 단속에 나서고 있다.
종로구청 관계자는 “탑골공원 뒤편에 보면 어르신들이 버린 담배꽁초와 술병이 많아 민원이 들어온다”며 “특히 탑골공원은 3.1운동 성지인데, 구청에서 내버려 두기 어렵다”고 말했다.
◆ 장기판 놓고 구청·어르신 ‘핑퐁게임’
현재의 단속 방식은 갈등만 되풀이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구청이 장기판과 의자 등을 수거하는 족족 어르신들은 다시 장기판을 깔아놓기 때문이다. 구청과 어르신은 장기판을 놓고 한 치 양보 없는 ‘핑퐁게임’을 이어오고 있는 셈이다.
어르신은 이에 공원 근처 노숙자 문제부터 해결해야 한다고 꼬집었다. 장기 대국이 벌어진 탑골공원 후문에는 노숙자가 술병을 끼고 잠을 자고 있어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어르신들에 따르면 이곳에선 노숙자의 노상 방뇨도 비일비재하다. 남녀 노숙자가 길 한복판에서 서로 신체를 만지는 낯 뜨거운 일이 있기도 했다.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 인근에서 술에 취한 남녀 노숙자가 서로 신체를 만지는 등 시민들 눈쌀을 찌푸리게 한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사진=독자제공 |
또 일방적인 단속보다는 도시미관을 해치지 않는 다른 방법을 고민해봐야 한다는 제안도 있다. 공 할아버지는 “장기판과 의자를 정리해 넣을 수 있는 작은 창고라도 만들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반문하기도 했다.
종로구청 관계자는 “어르신 스스로 깨끗하게 사용하면 문제없겠지만 너무 지저분하다”며 단속이 불가피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노숙자와 관련해선 “구청이 노숙자들에게 ‘어디로 가라’고 할 수 없고, (그들이) 정상적인 말을 알아듣는 것도 아니다”라고 전했다.
sun90@newspim.com